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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임근준의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

( ) 2014. 1. 9. 22:26

21세기 예술가의 조건? '또라이' 스펙!

[프레시안 books] 임근준의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

반이정 미술평론가   

 

 

형광 빛 분홍 몸체의 머리통이 사방으로 펑 터지는 순간을 묘사한 하위문화 풍 만화를 표지로 올린 임근준의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책읽는수요일 펴냄)은 '예술가의 자아 확장'이란 메시지를 유쾌하게 시각화한다. 제목도 표지만큼 인지 효과가 높다. 모호한 암시로 호기심을 구걸하지 않고 흡사 자기 계발서의 직설법처럼 본문을 향한 육감적 호기심을 부풀린다.

임근준의 전작은 <이것이 현대적 미술>(갤리온 펴냄)이다. 빈틈없이 명확하다. 목차를 일순 지목하는 제목의 단순성. 난해하기로 정평 난 현대 미술을 한 큐에 정리해주겠다는 의기양양. 이번 신작 제목도 오지의 섬처럼 현실과 유리된 예술(가)을 향해 불특정 독자의 아련한 선망에 즉답하겠다는 센스가 돋보이며, 본문 내용처럼 선정성도 있다.

임근준의 야무진 언어 구사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세세하고 해박한 정보가 켜켜이 쌓인 지문도 여전하며 이야기꾼의 자질은 탄탄하다. 국내 출판문화에서 흔히 간과되기 마련인, 단아한 문장 배치의 책 디자인의 시각성은 참신한 인상과 저자에 대한 신뢰를 남긴다. 콘텐츠 격인 지문과 책 디자인이 유기적으로 묶여, 속도감 있는 단문 모음집임에도 세간의 경박한 교양서의 전철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리 된 데에는 본문의 정보 밀도 탓이 크지만, 품위와 유모를 겸비한 디자인의 덕도 있다.

▲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임근준 지음, 책읽는수요일 펴냄). ⓒ책읽는수요일

이 책은 여느 제도권 시각 예술 평론가의 머리로 흔히 떠올리기 힘든 기획이다. 전공자를 타깃 삼기 마련인 제도권 평론의 용처와 달리, 책의 타깃은 미대생, 예술가 지망생, 전업 예술가 그리고 예술에 선망을 품은 교양 독자 일반을 아우른다. 본문에서 예술가다운 에고 트립퍼(자아의 확장을 꾀하는 '대체로' 개인주의적 기행)로 지목된 인물도 제도권 미술가(예술가)의 울타리를 넘어 언론인, 포르노 배우, 폭식 대회 수상자, 대중가수, 섹스 심벌, 코미디언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인용된다. 예술 전공자가 아니어도 심적 부담 없이 접할 수 있게 배려한 선별이거니와, 유별난 '예술적 자아 확장'을 낡은 제도권 예술가 그룹에 국한할 명분이 실은 없다는 인식에서 유연한 경계 넘기를 택했을 것이다.

임근준이 연전에 매체에 기고한 "대학 졸업을 앞둔 예비 작가에게"가 미대생 사이에서 널리 유포된 적이 있다. 전업 작가의 세계에 관해 대다수 미대생이 무지한 건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이들에게 수완을 일러주는 59항목의 지침은 압축적이고 예리했다. 동종업 종사자로 저런 야무진 필수 지침을 미처 떠올릴 생각조차 못한 걸 자성할 만큼.

그렇지만 현실 속 미대생이 이해/이행하긴 59항의 지침은 실효성이 적어보였다. 그 지침은 이미 현장에 나온 전업 작가가 볼 때 내심 '뜨끔'해 할 내용에 가까워, 그 지침으로 독려될 미대생보다 내적 열패감을 맛볼 미대생의 수가 많지 않을까 추정한다. 엄격하고 수준 높은 가이드라인으로 상대를 뜨악하게 만드는 임근준의 속셈도 책에서 말하는 에고 트리핑일 것이다.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풀어낸 '예술가의 자아 확장술'도 "대학 졸업을 앞둔 예비 작가에게"처럼 읽는 재미와 감동을 주지만, 독자와 저자 간 거리감을 좁히진 않으며, 저자에겐 그럴 의사가 없어 보인다(그마저 에고 트리핑일듯).

정리하면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은 제목마냥 예술가 되기의 수완을 알려주는 지침서는 아니다. 책머리에 앞서 프로이트를 짧게 인용한 글에, 에고 트립이 객관적 진실이 아닌 '예술적 언어유희'라고 슬쩍 양해를 해뒀더라. 영리하다. 제목은 지침서의 표정을 짓지만 저자의 남다른 에고 트리핑의 결과물, 그것이 이 책의 정체다. 단숨에 읽으며 유쾌하게 독서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 개인의 비평적 기호가 반영된 걸 감안해도 책에 소개된 자아 확장에 성공한 인물들은 예술(가)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가운데 기행을 일삼은 기인이나 입신양명에 성공한 사례에 집중된 감이 있다. 이런 독특한 안목이 허물일 순 없지만 "에고 트립의 성패를 평가"할 목적이라 밝힌 바에, 바스키아의 성공 배후의 가출(에고 트립의 일종)이 예술적 영감으로 연결된 배후를 풀이했으면 좋았겠다.

설마하니 가출이라는 일반 사건이 모두에게 성공적 에고 트리핑이긴 어려울 텐데, 영전한 바스키아의 가출이 성공의 동기 부여일 수 있는 내막을 지문은 말해주지 않는다. 나무랄 데 없는 거물의 다채로운 에고 트리핑이 열거되지만, 이들의 속세적 성공이 미학/윤리/정치적으로 타당한 이유를 저자는 밝히지 않는다. 권력 쟁취로 귀결된 예술가의 유별난 처신과 대중이 주목하는 그들의 품위에 본문은 주목하지만, 그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방대한 에피소드로 대체된다. 가치 판단이 유보된 성공한 전위 예술가의 열거는 그래서 보수적이다.

11장(역사 희롱)과 12장((만방에 과시하는) 사랑)은 해당 인물의 시시콜콜한 과거사가 꼼꼼히 정리되었지만 읽다보면 이내 지루해지는데, 결론적으로 명망가 연인을 연달아 갈아치운 작곡가 말러의 부인 알마 말러의 에고 트리핑이 유의미했다는 건지, 섬세한 모작(模作)으로 미술사학계를 감쪽같이 속인 중국화가 장다첸이 미학적 타당성을 띤다는 건지 가치 판단은 끝없이 유보된다. 어쩌라고?

머리말에서 '성난 젊은이의 에고 트립'으로 지목된 강의석의 단식도 그렇다. '자아 확장의 방도'로 그 사건을 환원시키는 건 전적으로 틀린 주장이 아니며, 사태 이해의 난이도를 낮추는 명확한 기술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해당 사건을 둘러싼 문맥이 제거되면서 강의석의 단식은 '특별한 개인의 선택'으로 한정되는 논리 비약이 된다.

학벌 사회에서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신분으로 종교 사학에 맞서는 단식이 단순한 개인적 사건일 리 없다. 강의석은 이미 '정치 사회적 개인'이 된 것이다. 강의석의 자리에, 채식(책에선 죄책감을 유도하는 자아 확장으로 해석됨)이나, 죽음을 체험한 앤더슨 쿠퍼나, 반미학의 사도 마르셀 뒤샹을 대입해도 의미는 통한다.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의 독보적 매력 중 하나는 본문과 삽도가 전반적으로 '음란과 퇴폐의 긴장감'을 품위 있게 유지하며, 일반인의 숨겨진 욕망을 대신 긁어준다는 것이다. 근엄한 기존 예술서의 상투적 표정을 따라하지 않는다. 총 13개 목차를 보조하는 삽도 가운데 섹스어필을 암시하는 것만 6장(딜도를 쥔 천수보살(?), 교미 중인 원숭이, 모텔에서 초짜 연인의 미숙한 페팅, 양물, 음문, 교미중인 장수하늘소). 지문 틈틈이 등장하는 동성애 기술까지 가세하면서 책은 전례 없이 섹스어필을 대놓고 표방하면서도 인문 교양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본문에서 서슴없이 표기된 비속어 '자지' '보지'조차 읽는 이가 무안해 하긴 고사하고 괴상한 후련함을 맛보게 되는데 그게 은근히 미학적이다. (연전에 도올 김용옥이 어째서 '자지' '보지'를 공식적으로 못 쓰냐며 제 책에서 역설한 모습이 떠올랐다.)

임근준은 일반적 시각 예술 평론가 그룹보다 비교우위 거점을 확보했다. 우선 1990년대 중반 동성애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다수 독자/소수 예술 평론가에겐 여전히 미지의 영역의 에피소드를 풍성하게 풀어낼 밑천이 된다. 책의 거의 모든 장에서 동성애 예술가의 자아 확장이 인용되는 이유다.

해박한 정보 집중력도 저자의 강점이다. 학술 논문처럼 꽤 촘촘하게 원문이 인용 되지만 거부감 없이 읽힌다. 전적으로 섹시한 글 구성과 해박한 정보력이 저자의 신뢰도를 높인다. 다만 독자로선 사실관계를 당장 확인할 길이 없어 정보 제공자의 일방성이 강화되는 비대칭 구조가 형성된다.

얼핏 꺼림칙한 지문을 만나도 단박에 반박할 길이 안 보이는데, 신속한 문장 전개에 밀려 의구심이 금세 잊힌다. 그건 저자의 영리한 집필 스타일이 사실과 주장 사이를 모호하게 만들어서다. 많은 문장이 객관적 사실 나열, 즉 기술(description)인지 해당 사실에 관한 저자의 지지내지 해석(interpretation)인지 불분명할 때가 무척 많다.

정보의 벅찬 쓰나미에 밀려 저자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고도의 기술(skill)로 나는 이해하고 있지만. 이런 논리 전개는 결과적으로 저자의 철학을 무정형 독자의 무리로부터 멀찌감치 분리시켜 미지의 외딴 섬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낳고, 파생적으로 저자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극소수 독자와의 연대를 확인시키는 효과도 챙긴다.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에 소개된 13개 에고 트립 중 일부는 저자가 공유하는 것 같았다. 해서 이 책은 자기 기술의 변형이자 에고 트립의 연장처럼 읽힌다. 무모한 예술 비평서가 유통되는 현실에서 톡 튀는 개인의 재기발랄한 에고 트립이 예술서의 형태가 된 건 고무적이다.

다만 만일 '일정 수위에 이른' 교양 독자층을 위한 책을 지향한다면(아마 아닐 것 같은데), 지금의 기술 방식은 장기적으로 독자와 저자 모두에게 무익할 수 있다. 실존적 에고 트리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저자에게 이런 조언은 근본주의자의 한계로 읽힐 게 분명하다. 실존적 에고 트리핑의 지지를 포기하는 순간 저자의 정체성은 확보되기 힘들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사족 하나. 책을 따라 가보니, 책에 지목된 자아 확장형 예술가와 나는 대체로 불일치하더라. 지각해도 대범한 디바들이 소개되던데, 고작 5분만 늦어도 초조해 연신 시계를 쳐다보다 상대방에게 확인 문자나 발송하는 나는 여지없는 소시민(자신을 낮춰 반사 이익을 챙기는 에고 트립 아님). 내가 아는 한, 대범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괜찮은 예술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