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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가다] <17> 식민지 조선의 인공낙원, 백화점

오 창작소 2014. 3. 1. 14:59

 

경성 5대 백화점, 조선인들 일상에 식민지 자본주의를 깊게 심다

 

 

[역사의 현장을 가다] <17> 식민지 조선의 인공낙원, 백화점 ①
화려한 외관·진기한 상품으로 '충격과 동경'의 대상 돼
언제나 인파로 북적… 중소상인은 갈수록 어려워져
갤러리는 제국의 시각을 반영·홍보하는 공간으로 활용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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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백화점은 이식된 근대성의 상징이었다. 1930년대 경성의 미쓰코시백화점 내 갤러리에서 일본인들이 서양화를 감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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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화점의 옥상정원 카페(오른쪽)는 모던보이, 모던걸이 즐겨찾던 명소로, 이상의 단편소설‘날개’ 종반부에서 주인공이 독백한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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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미쓰코시백화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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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박흥식이 운영한 화신백화점. 한국전쟁 중 없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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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원호청 자리에 있었던 미나카이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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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를 정복하려면 총칼의 힘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정복한 나라를 계속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력만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식민지 지배는 언제나 물리력뿐 아니라 정신적 측면에서 공작을 병행해왔다. 일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 식민사관을 퍼뜨리고 소위 '문화통치'로 민족 분열을 부추겼으며, 자본주의적 경제제도를 이식해 근대성을 과시했다.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백화점이 한반도에 생겨난 것은 식민 통치가 본격화한 1920년대 중반. 번쩍이는 쇼윈도와 그 안의 진기한 상품, 신식 판매제도 등을 갖춘 백화점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충격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백화점은 조선의 중소상인을 위협하는 한편, 대중의 일상에 깊게 파고들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로 1가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러나 쇼핑백을 든 사람은 열에 한 명이 안 됐다. 예나 지금이나 백화점은 꼭 물건을 사기 위한 곳이라기보다 입장료가 없는 쾌적하고 세련된 복합문화공간에 가깝다. 80년 전에도 이곳은 수많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 문인, 예술가, 룸펜 등에게 사교와 담화를 위한 장소였다.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명품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구관은 일제시대 최고의 매출을 자랑하던 미쓰코시(三越)백화점이었다. 2005년 본래 외관을 그대로 살려 재개관했다. 일제강점기 이 건물에 있던 중앙계단 일부가 경기 용인시 남사면의 '한국상업사박물관'에 남아 있다.

일찍이 서양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1905년 백화점이 첫 문을 열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대량소비를 유도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자본주의가 한창이던 1920년대, 경성에 진출해 있던 히라타(平田ㆍ현 중구 충무로 1가 대연각빌딩) 상점이 1926년 백화점으로 전환하면서 백화점 시대가 열렸다. 혼마치(本町ㆍ일본인 거리로 현재 명동 일대)에 터를 잡은 조지야(丁子屋ㆍ현 소공동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와 미쓰코시, 미나카이(三中井ㆍ옛 원호청) 등 일본 백화점과, 유일하게 조선인이 운영하는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을 합쳐 경성의 5대 백화점이라고 불렀다.

백화점은 으리으리한 외관부터 조선인을 압도했다. 황홀한 쇼윈도와 엘리베이터 등 신식시설을 갖춘 백화점은 수학여행이나 상경객의 필수 관람 코스가 되어 연일 붐볐다. 박태원의 소설 '여인성장'은 "마침 구경을 온 듯 싶은 시골 사람이 두 명 저편 철책 압헤 가 서서 입을 따버리고 연해 눈을 두리번거리며 시가를 나려다보고 잇섯다"라고 당시 미쓰코시백화점의 옥상정원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인은 고급음식점, 미술관 등을 갖춘 백화점을 즐기는 일 자체를 새로운 문물의 혜택으로 느꼈다.

물건을 파는 방식도 혁신적이었다. 정찰제와 할인 대매출, 무료 배달, 자유로운 반품, 광고, 상품권 발행 등은 옛 상점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다. 귀금속, 가구, 양복 등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취급 품목을 보고 당시 한 신문은 "사서 들고 나아오는 것은 안 사도 조흘 것 같은 것"이라며 "전당을 잡고 무엇을 팔아서 물건을 사지 말고… 백화점에 밋치지 말라는 말슴"이라고 세태를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백화점의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 1933년 2월 미쓰코시와 화신, 조지아 세 백화점의 하루 고객 합계는 34만명으로, 당시 서울 인구 30만명보다 많다.

일본 경제학자 하야시 히로시게(林廣茂) 는 저서 <미나카이백화점>(2007)에서 "조선 사회의 일본 '적응화'와 조선인의 일본인 '적응화'가 강하게 진행되었고, 그 노하우가 해방 이후의 한국에 이어졌다"면서 "특히 1935~40년에는 백화점이 융성할 정도로 조선인의 구매력이 높아졌다"고 호혜적 관점에서 조선의 백화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백화점에서 소비할 수 있는 계층은 극히 일부였고, 이는 대중에게 새로운 계급의 탄생을 의미했다. 가령 백화점 인근 혹은 내부 카페의 커피 한 잔은 10~15전으로, 조선인 남자 노동자의 일당 60~80전으로 드나들기란 쉽지 않았다.

일본은 자국에서 중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하던 '백화점법'을 조선에서는 일절 펼치지 않았다. 조선을 침탈의 대상으로 여긴 방증이다. 1935년 1개 백화점의 평균매출액(243만원)이 개인상점의 184배에 이르는 등 중소상인의 어려움은 날로 더해갔다. 같은 해 5개 백화점의 매출액은 서울시내 약 7,800여 개의 상점 매출액의 5.6%(2억 1,300여 만원 중 1,200만원)를 점했다. 백화점 내 갤러리는 제국의 시각을 반영하고 홍보하는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다. 친일 화가 김은호가 1937년 중일전쟁 때 친일여성단체 애국금차회가 금을 헌납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이틀간 전시한 것이 그 예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도 백화점 열풍은 대단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백화점은 향유 계층이 극소수로 한정돼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식민지 자본주의를 오롯이 드러내는 아픈 공간이었다.

해방된 지 65년, 오늘도 백화점은 손님들로 붐빈다. 소비할 것을 찾아 화려한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21세기의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을 보며, 1930년대 경성 풍경을 떠올려 본다.

입력시간 : 2010/05/24 22:35:29  수정시간 : 2010/05/25 14:2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