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누가 ‘창조’를 명령하는가 / 문강형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창조’는 하나의 덕목이자 명령이 되었다. 규제라는 “암 덩어리”를 없애면서 ‘창조경제’를 실현하는 대통령, 인문학을 통해 창조적 인재가 되라고 역설하는 신세계 그룹, 개인의 창조성으로 서바이벌 경쟁을 펼치는 <아트 스타 코리아>는 한국 사회에서 ‘창조’가 응용되는 대표적 사례다. 이제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창조’라는 명령을 피해갈 수 없다.
근본적 이유는 자본이 창조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비스, 정보, 금융상품 등 정동과 지식, 숫자에서 이윤을 뽑아내는 금융자본주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모습을 바꾸며 자신을 계발하고 경영하는 ‘유연한 주체’를 요구한다. 경계나 규제는 제거될 ‘암 덩어리’로 변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아이디어’가 강조된다. 노동은 더 이상 ‘노동’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창조적 활동, 즉 ‘예술’이 된다.
원래 ‘창조’는 독창적인 창작활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이성을 가진 생산 말이다. 이런 창조적 활동은 따라서 예술이나 문학 영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낭만주의의 ‘천재’ 개념이 그렇듯, 창조하는 이는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이고, 따라서 신적인 존재가 된다. 오늘날 정부와 자본이 강조하는 ‘창조’는 그 부드러운 외양과는 반대로 이런 케케묵은 낭만주의 천재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 시대 ‘창조’의 아이콘으로 동원되는 잡스, 게이츠, 저커버그가 될 수 있는 이들, 곧 아이디어를 상품과 결합시켜 성공을 거두는 이들은 언제나 극소수다.
‘창조’의 문제점은 여기서 나온다. ‘당신도 가능하다’며 극소수의 능력과 행운을 노동자 전체의 의무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창조’가 생존 요건이 되자 이제 다수는 ‘창조’를 ‘배운다’. 자기계발서를 연구하고, 강의를 듣고, 고전을 읽으며 창조의 모범답안을 암기한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니 수능평가 방식을 연구하고, 논술이 추가되니 논술을 암기하고, 봉사점수가 있다니 봉사를 배우는, 한국 사회의 생존 방식이 이제 인문학과 예술로까지 확대된다.
‘창조’란 천재들의 전유물도, 상품으로 변환되는 아이디어도 아니다.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좋아서 하는 놀이가 깊어져 어떤 수준을 넘어설 때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아이도, 노동자도, 아저씨도, 할머니도 삶에서 작은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이창동의 영화 <시>는 할머니가 쓰는 초라한 시 속에 들어 있는 삶과 윤리의 깊이를 보여준다. 문제는 누구나의 창조적 능력을 천재만의 것으로, 상품으로, 채용기준으로 만들어 특화하고 대상화하는 정부와 자본의 좁고 천박한 상상력이다.
‘창조경제’, ‘청년영웅’, ‘인문학’을 외치며 국민 전체에게 ‘창조’의 압박을 강요하는 정부와 자본의 의도는 사실 다른 곳에 있다. 이윤을 남기는 창조가 가능한 소수(즉 ‘인재’)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다수는 배제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정지작업 말이다. 모두에게 잡스나 저커버그가 되라고 명령하면서 다수의 노동, 학업, 삶은 더욱 여유 없고 팍팍하게 만드는 일, 그래서 실패한 이가 자기 탓을 하며 조용히 사라지게 만드는 일. 좋은 사회란 뭘까? 모두가 수준급 예술가가 되진 못해도 모두가 예술을 즐길 수 있고, 자기 삶 속에서 소박한 창조적 놀이를 펼칠 교양과 여유를 가지는 사회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노동에 ‘창조’를 덧씌움으로써 실제로는 노동자의 권리와 복지를 후퇴시킬 뿐 아니라, ‘창조’를 평가와 경쟁으로 상품화하며, 삶 속의 작은 창조와 놀이를 위한 여유마저도 빼앗는 중이다. 결국 창조, 예술, 인문학의 제스처는 넘쳐나면서도, 사람들의 삶은 더더욱 메말라가는 슬픈 역설이 만개하는 것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출처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