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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베이컨의 외침을 감각하다 (펌)

오 창작소 2015. 2. 5. 17:02

들뢰즈, 베이컨의 외침을 감각하다

[청춘의 고전 시즌2]<10> 베이컨의 <세 초상화>와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 Three Studies of George Dyer, 1966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이 그림은 베이컨(Francis Bacon, 1909~ 1992)이 그린 인물의 초상화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초상화와 많이 다르다. 일그러지고 뒤틀려있어 원래 누구의 얼굴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 힘들다. 흡사 피카소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가 뒤섞인듯하고 대상을 왜곡시키며 순간을 포착한 듯 보이는 이런 화법은 베이컨 그림의 특징이다. 

청춘의 고전 열 번째 강의에서 만나볼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리며 얼굴을 '해체'시켰듯이 항상 자신의 그림에서 '형상을 해체'시킨다. 이 해체를 두고 김범수 교수는 "이것은 가장 감각적인 상태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베이컨의 그림에서 "왜 얼굴이 일그러지는가?"라고 다시 묻는다. 여기에 답하려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철학에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이번 강의에서 들뢰즈의 철학을 안내해줄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가 "감각은 심층에서 방출 된다"고 말한 점을 강조하면서 베이컨은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자화상의 경우 그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찌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이 베이컨의 그림과 들뢰즈의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김범수 교수는 "사실 들뢰즈는 이미 『감각의 논리』란 책에서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바가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당시 철학자로서는 파격적인 외도를 많이 했는데 문학, 미술, 영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들뢰즈는 이런 독특한 철학관을 통해 베이컨과 관계를 맺고 그의 그림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체계는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1930~1992)와 함께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에 대한 정의를 '개념창조'라고 한데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개념창조란 말은 들뢰즈가 자주 쓰는 내재성의 철학ㆍ유목의 철학이란 말과 일맥상통한다. 내재성이란 초월성(신, 이념, 자유의지)과는 반대의 개념이고 경험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 자연 전체의 얘기이고 경험하는 세계는 『장자(莊子)』에서 말하는 혼돈상태와 같다. 이 때 혼돈은 규정되지 않은 상태를 지칭한다. 규정되지 않은 이 애매모호함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은 신을 찾았고 자유의지를 찾았다. 또 정치에서 이념은 신을 대신하기도 했다" 

들뢰즈는 이런 통념을 바꾸려고 한 철학자다. 그런데 철학을 하면서 '규정'이라는 것은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들뢰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개념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들뢰즈는 '개념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베이컨의 '외침' : 재현체계의 거부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는 "예술은 감각-정서의 구현"이라고 정의한다. 예술은 감각의 구현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이것은 '내재성의 사유'와 다를 바 없고 들뢰즈는 결국 예술과 철학이 모두 '내재성의 사유'와 관련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하면서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에 주목한다. 이 그림은 원래 벨라스케스의 원본 그림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리메이크한 그림이다.

▲ 좌측 :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 1650 ⓒDiego Velázquez(디에고 벨라스케스) / 우측 :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 1953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외치는 듯 보이는 얼굴의 묘사는 괴기스럽고 보는 이로 하여금 다분히 공포감을 준다. 얼굴은 마치 빛의 간섭현상처럼 바탕과 중첩되면서 해체되는데 이를 들뢰즈의 용어로 '아플라(aplat)'라고 한다. 아플라가 존재하고 형상은 지워지며 윤곽이 그려지면서 기존의 구상미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이 되었다.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다시 그린 이유로 관람자들이 교황의 그림이라는 선입관으로 그림에서 기존의 서술적 이야기를 끌어내는 점을 문제 제기하면서 동시에 엄숙한 원본 그림과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인식이 선행되기 이전에 감각을 일깨우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김범수 교수는 이어서 베이컨과 들뢰즈의 공통점을 '재현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베이컨은 전통적인 구상미술의 재현을 거부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은 전통적인 재현체계를 갖춘 구상미술의 전형이다. 그림 안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이미 기존의 것과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고 화가는 이것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에 불과하다. 기존 통념으로 주어진 것 위에서 다시 재현하는 이런 체계는 감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아테네 학당, 1510~1511 ⓒRaffaello Sanzio(라파엘로 산치오)

들뢰즈의 철학 역시 표상ㆍ재현체계를 거부한다. 김범수 교수에 의하면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특히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기준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미 존재하는 틀거리(근거)에 특정 사안을 외삽(外揷)해 버리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기존의 주어진 것에 그냥 덧붙여서 추정되는 결론을 맞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습관에 의한 사유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은 내재성이 될 수 없고 창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이 재현의 체계를 거부했다는 것이 들뢰즈에게는 큰 매력으로 느껴졌을 것이고 이것이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한다. 

'기관 없는 신체'와 '고기-되기' 

들뢰즈는 당시 '잔혹(殘酷) 연극'이론으로 무대 위에서 대사뿐 아니라 조명‧음향‧배우의 몸짓 등을 통해 훗날 전위극(前衛劇)이라는 새로운 감각의 연극 장르를 개척한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에게서 빌려온 개념 '기관 없는 신체'가 베이컨의 작품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말했다.

베이컨은 항상 "나는 공포보다 오히려 외침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고 더 나아가 "나는 결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미소를 그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공포는 외침을 통해 완화되고 입은 벌려진 채로, 얼굴은 주변의 배경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얼굴이 변형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신체 기능이 사라지면서 그 '기능'은 새롭게 재편된다. 베이컨은 <Painting>에서 이른바 '고기-되기'ㆍ'동물-되기' 라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되기'라는 개념은 감각과 힘을 다시 배치한다는 의미이다. 

▲ Painting, 1946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김범수 교수는 '되기'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예를 들어 축구선수가 야구선수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축구선수의 근육과 운동 및 환경이 야구를 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바로 이 새로운 배치가 '생성'의 의미이고 '되기'의 의미라고 한다. 우리는 골키퍼가 절묘하게 공을 막아낼 때 '동물적 감각'으로 골을 막았다는 표현을 한다. 이 표현은 골키퍼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각과 힘을 동물과 같은 상태로 배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가장 감각적인 순간이며 가장 감각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인 동물적인 것은 고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신체의 '기능'은 중요하지 않고 '감각의 다발'의 '배치'가 중요하다. 

여기서 '기관'과 '신체'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면 '기관'이란 "기능에 국한된 하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그 목적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고 '신체'는 이와는 반대이다. 들뢰즈는 "신체는 물질덩어리로 '강도 0'의 상태, 즉 양 힘이 팽팽하게 맞붙어 움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김범수 교수는 "내 가슴 앞에서 양 주먹을 맞붙여 동시에 가운데로 힘을 가하는 상태가 바로 이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두 주먹의 배치가 달라지면 균형의 상태가 달라지듯이 '신체'는 힘들로 가득해서 역량들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이 이루어지는 상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강도로 가득하고 감각과 정서가 집약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기관 없는 신체'에 해당한다. 

<Painting>에서 베이컨은 고기를 '감각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사용했다. 그림 안에서 잔혹해보이지만 끊임없이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들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베이컨은 여전히 형상을 지운다. 그림 속의 우산은 얼굴 없는 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서든 차단하려는 용도이며 바탕에서부터 대상의 이야기가 다시 배치되게끔 그림을 그려냈다. 이런 감각의 배치 때문에 베이컨이 그린 초상화 속의 얼굴은 항상 일그러져 있고 변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겉모습이라 함은 오직 한 순간에만 고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잠깐 눈을 깜박이거나 고개를 약간 돌렸다가 다시 보면 그 겉모습은 이미 달라져 있다. 내 말은, 겉모습이란 계속적으로 '떠다니는 것[부유(浮遊)]'과 같다는 의미이다" - 프란시스 베이컨 -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에게 있어 '얼굴의 왜곡'이란 "사물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존재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가장 감각적인 상태를 구현"함으로써 "저 심층에서부터 감각을 방출시켜 안정 상태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충동'을 반영하고 있다"고 정리한다. 김범수 교수는 여기에 덧붙여 이 상태는 프로이트가 말한 '흥분을 적당히 방출하는 것이 평온의 상태며 쾌락의 상태'라는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베이컨의 그림은 변화하고 생성하는 상태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며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그 의도를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 자화상, 1971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들뢰즈의 존재론과 베이컨 그림 

베이컨이 많은 작품들에서 보여준 시도들은 들뢰즈의 철학에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들뢰즈의 존재론과 관계하는데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전통적인 'be' 동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can'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적 'can'의 의미는 단순히 무엇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으로, 생성으로, 창조로 자신의 존재론을 구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있음'에 대한 이야기는 전통적 존재론이다. 김범수 교수에 의하면 고대 철학의 이데아론, 범주론 등은 모두 'be' 동사의 얘기로 'be'는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때 확실한 규정이 생긴다. 그러나 들뢰즈의 존재는 주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 없이 'can'-'pouvoir'-'puissance(힘, 역량)'으로 얘기할 수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변화하는 존재의 양태를 'be'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주체는 '애벌레 주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김범수 교수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 Cogito ergo sum)" 명제를 예로 들면서 완벽한 인간의 이성적 사유와 주체성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 보이는 이 명제도 결국 최종 확인을 위해서는 수많은 '나'가 있어야 하고 그 수많은 '나' 중에 또 주체가 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에는 '나'라는 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작동시켜주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내 안에 여러 '나'가 꿈틀대고 있는데 이 여러 '나'들의 힘들이 작동되는 관계가 있고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이 관계가 작동된다. 들뢰즈에게 '있다'라고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생성하는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자리에 지금 존재하는 '내'가 있지만 내 안에 많은 '나'들이 분화하여 새로운 관계들을 이 안에서 맺고 있다는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예를 들어 다시 들뢰즈의 존재론 설명을 이어간다. "스피노자의 경우 제일 중요한 개념은 '실체'이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자연전체'이며 실체가 자족적으로 관계들에 의해 변화한다. 내부에서는 변화들이 우글거리는데 '기관 없는 신체'는 바로 그 상태를 말한다. 들뢰즈는 지구를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하는데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실체개념이고 역량으로서의 존재이다"

이 존재론이 베이컨에 와서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회화의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 자체가 자신의 존재론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생성을 얘기하고 기존의 습관적이고 재현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이 저 밑바탕에서부터 배경과 함께 다시 배치되는 모습, 이것은 끊임없이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이며 이 자체가 '기관 없는 신체'이다. 같은 맥락에서 베이컨이 구상화의 틀을 버리고 서술에서 벗어났을 때, 저 밑바탕에서 찾은 새로운 것은 고기, 동물,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에 해당한다.

* <청춘의 고전 시즌2> 다음 강의는 9월 8일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원장의「세잔의 <대수욕도>와 그 감각적 리듬의 철학적 정체」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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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모형에 반대한다”

모든 욕망을 ‘기계’로 설명하는 들뢰즈·과타리에게 본질은 없다. 이들은 세계를 ‘오이디푸스 극장’으로 치환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이냐고? 이 싸움터에서 프로이트는 전사할 것이다.
/장정일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처음 나왔을 때, 작품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서평자는 “그것은 나를 쓰러뜨렸다. 나는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라고 실토하고 말았다. 이 일화는 나이절 니컬슨의 <버지니아 울프:시대를 앞서간 불온한 매력>(푸른숲, 2006)에 나온다.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민음사, 2014)를 펼쳐놓고 우리도 똑같은 푸념을 해야 할까? 안 그래도 된다.

모든 ‘욕망’을 ‘기계’로 설명하는 들뢰즈·과타리에게 본질은 없다. 모든 욕망은 무수한 분열과 접속하면서 새로운 기계가 된다. 호흡을 할 때 입은 ‘생명-기계’가 되고, 음식을 씹을 때는 ‘저작-기계’이며, 말을 할 때는 ‘연설-기계’, 입맞춤을 할 때 그것은 ‘성애-기계’다. 구순기 아이는 모든 사물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 빨아본다. 이 습관은 추론 능력이 발달하면서 차츰 그치게 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 용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 사람들은 얼마만큼 ‘약’이 남아 있는지 재보고자 건전지의 배꼽(+)에 혀를 댔고, 올림픽 메달 시상식에 올라선 젊은 금메달리스트는 승리의 기쁨을 음미하고자 앞니로 금메달을 깨문다. 이런 입이 ‘계측-기계’라면, 병마개를 따거나 실을 바늘귀에 꿰기 위해 입으로 실 끝을 뾰족하게 할 때 그 입은 ‘연장-기계’다. 여기서 어느 것이 입의 본질일까?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지영 그림</font></div> 
ⓒ이지영 그림
이 책을 번역한 김재인은 ‘옮긴이의 말’에 “외국에서 간행된 저술과 논문들 그리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접한 강연과 대화를 통해,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 시점에서 세계적으로도 충분히 이해된 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라면서, 저명한 들뢰즈 연구자 이언 뷰케넌이 이 책은 “저자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성취일 정도”라고 논평한 것을 인용해놓았다. 이런 ‘취급 주의’는 유념해야 하되, 흠이 없지 않다. 독서 지도사들은 책에는 그 책만의 고유한 주제가 있으며 독서란 그 책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닦달하지만, 들뢰즈·과타리 사용법에는 그런 본질이 있을 리 없다. 이 책은 독자의 용도에 따라 존재론·윤리학·정신분석·자본주의론·파시즘 비판·인류학·문학(예술)론·문화 이론 등으로 얼마든지 절단하여, 새로운 쓰임새(생성)를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독후감을 쓰기 위해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동녘, 2013)에 요약된 옮긴이의 박사 논문에 얼마간 의지했다.

제목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안티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모형(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반대하며 그것에 저항한다. 오이디푸스 모형의 거부는 궁극적으로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을 표적으로 삼는다. 들뢰즈·과타리가 반(反)정신분석을 외치는 이유는, 정신분석이 하나의 시작(본질)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 무의식의 밑바탕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흘레붙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석 또는 오이디푸스 모형은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하나는 생성하기도 이전에 이미 인간이라는 본질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 모형이 금지와 위반을 토대로 법(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모형에 따르면 무의식의 주인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무의식의 주인으로 모시고 일체의 현실을 그것과 연관 지어 설명하게 될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도, 아돌프 히틀러의 등극과 독일 국민의 열광도, 짐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과타리 지음김재인 옮김민음사 펴냄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과타리 지음김재인 옮김민음사 펴냄
모리슨과 커트 코베인의 자살도, 이상과 기형도의 작품도 모조리 ‘가족 문제(오이디푸스 모형)’로 수렴되고 봉합된다. 자칫 두 사람의 주장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체가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라 세계를 ‘오이디푸스 극장’으로 치환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가족들은 가족적이지 않은 절단들에 의해 절단된다.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종교와 무신론, 스페인 내전, 파시즘의 대두, 스탈린주의, 베트남 전쟁, 1968년 5월……. 이런 것들이 모두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형성하는데, 이것들은 늙어 빠진 오이디푸스보다 더 영향을 끼친다.” 들뢰즈·과타리는 ‘무의식에는 부모가 없다, 무의식은 고아다’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오이디푸스(늙어빠진 부모=법 모델)라는 편집증적 억압 아래서 승화가 생겨난다고 말하는 프로이트를 공박하면서, 그런 억압 아래서보다 분열증적인 ‘고아-기계’가 생성에 더 능하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의 한국적 분석을 시도한 책이 있다?

들뢰즈·과타리는 문화주의자들과 정통 정신분석가들 사이에 고갈되지 않는 유명한 논쟁이 있다면서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일까?”라고 묻는다. 이 싸움터에서 프로이트는 전사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손쉬운 답변은 1937년, 린위탕(林語堂)이 미국에서 출간한 <생활의 발견>(삼중당, 1975)에 나온다. “저 정신분석학적인 오이디푸스적 인과관계,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니, 아버지와 딸 사이의 콤플렉스니,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콤플렉스니 하는 프로이트의 학설 같은 것은 꺼내놓았댔자 중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우스꽝스럽기만 하고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린위탕은 설명을 생략했는데, 그것의 한국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이다.

크리스토퍼 레인의 <만들어진 우울증>(한겨레, 2009)과 에단 와터스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아카이브, 2011)는 미국 정신의학협회와 제약회사가 결탁한 정신장애 진단 통계편람(DSM)이 세계 여러 문화권의 정신질환을 균질하게 만들었다고 규탄한다. 예컨대 제3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정신병을 신의 은총이나 현세에 대한 거부로 여겨왔는데, 서구의 생의학이 침투하면서 환자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그 사회의 문화적 서사로부터 분리된다. 하지만 <안티 오이디푸스>는 미국식 정신장애 진단 통계편람이 여러 문화권의 정신질환을 평평하게 만들기 훨씬 이전에, ‘오이디푸스 제국’에 의한 식민화가 먼저 일어났다고 말한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1994년 같은 출판사에서 최명관이 번역했던 <앙띠 오이디푸스>의 두 번째 번역본이다. 첫 번째 번역본이 나왔을 때 한국은 구제금융(IMF)을 맞기 이전의 장밋빛 시대였다. 그때 누가 “자본주의가 그 본질에 있어 혈연적 산업자본이라는 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상업적·금융적 자본과의 결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느 모로는, 체제 전체와 욕망의 투자를 쥐락펴락하는 것이 은행이다”라는 구절의 위력을 예감했을까? 지은이들은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이나 내파가 모두 분열증의 성취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지독히 이율배반적인 이 원리 속에 우리의 희망과 절망이 혼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