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말하고싶은대로

2016년 5월 5일 오후 07:38

오 창작소 2016. 5. 5. 19:38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인간의 위대한 실천이다. 하지만 오늘날 데카르트의 이 유명한 명제는, 누구나 들어 알고 있지만 아무도 쉽게 긍정하지 않는 낡은 선언이 되고 말았다. 지금 그 누가 한 점의 의심 없는 "나"를 진심으로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영악한 우리들은 오히려,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나의 존재가 가능할 수 있다는 라캉의 전언에 감동한다. 결국 내 사유의 명징함이란 일종의 환각에 지나지 않으며, 오로지 나는 이 세계를 착각함으로써만 가까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생각 따위가 아니라 세계로부터의 우발적인 자극을 받아들이는 나의 불안한 그 감각들이다...  


-바로 그 시간 中        





 근대적 개인의 탄생으로 주체의 존재 방식을 사유로 규정했던 데카르트의 '나'가 있다. 나의 생각과 존재 방식의 데카르트적 자아는 고립을 전제로 한다. 타자와 세계로부터 독립된 자아의 확인으로 주체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자아의 데카르트적 존재 방식을 심리학으로 번역하면 '나는 고독하므로 존재하다' 라는 김정운 교수의 시선이 흥미롭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의 본질을 '불안'으로 봤다고 한다.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라는 뜻으로 피투성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시간으로 인한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는 피투성이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