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중 한컷
-아그리고-
-루시퍼-
나에겐 공공예술 작업으로서의 접근은 경험되는 내 삶에서 가장 존재에 가까워지고픈 수많은 질문들의 답을 찾기 위한 또 다른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사회적인 소수자로서 예술을 한다는 난, 내가 굉장한 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을뿐더러 그럴 여유조차 없는게 현실이다. 당연히 그런 의무감에서도 멀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틈틈이 작은 소리를 내보지만 미약하다. 자괴감 따위는 들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다.현실이 여유로움 마저 느끼지 못하게 한다.
태어나 이제껏 도시에서 자라온 나에겐 도시 속의 삶이 제일 편하고 익숙하다. 전형적인 도시인이다. ‘적당히’ 제도권 안에서 이리저리 체이며 ‘적당히’ 성장해왔다. 그렇게 성장해오는 동안 내 안의 목소리는 조금씩,조금씩 잊혀져갔다. 그런 내가 궁금해 한다. ‘난 누구이며 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건가...?’ 어디서 올라오는지~질문들은 끝이 없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주변 것들이 신기하다. 또한 거슬러 오르는 내 삶도 신기하다. 이렇게 작업한다. 내 삶을...
인스턴트식 삶은 편리하다. 일의 과정을 대략 줄이고 생략할 수도 있다. 적당히 이성적이며 계산적이다. 수치로서 삶을 규정짓는 건 분명 편리하다.
단, 삶은 알다시피 계산되어질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그런 불분명하게 조그마한 단편이 삶의 방향과 틀을 크게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연스러운 부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농촌에서 겪어야했던 새로운 환경에서의 시간들은 내가 감당해야 했었으며 이미 익숙한 도시에서의 삶은 자연스러움이 아닌 익숙함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더욱더 살갑게 느낄수 있었으며 불분명한 기회로 맞닿을 수도 있었음을 느낀다.
나의 눈에 사물들의 움직임이 멈춰져 시간과 공간을 느낄 수 없었던 그곳 진안.
고요함만이 가득하던 그곳에서 시시각각 불어오던 세찬 바람과 이곳저곳에서 울어제끼던 새소리와 새파란 하늘 속에 자기 갈길 가던 흰구름 들만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나를 깨웠다. 서슬퍼런 정적과 고요함은 외부로서의 고립된 고독과 홀로가 아닌, 스스로 그렇게 묵묵한 고독이며 평화였다. 이러한 평화스런 정적과 고독은 존재만이 알 길이다.
다시 삶으로 돌아가 익숙함에 익숙해지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내 삶의 다른 흰 여백을 또 다시 체워 나간다. 긴장이라는 점의 시작과 끝에서 이완이라는 선을 그으며 동전의 양면처럼 모순된 삶을 살고 이어서 다른 하나의 점은 시작이 끝이며 끝은 곧 시작일 수 있음을 알게 될 때 조금씩,조금씩 여백은 아름다운 삶의 작품으로 완성되어질 것이란 걸 의심치 않는다.
거칠던 부드럽던 삶과 삶의 만남의 그 반가움이란 가슴에서 나오며 진지함은 그에 대한 갈증이란걸 느끼게 함을 이번 프로젝트에서 배운다.
◆ 작업을 하던 주변 풍경이었다. 틈틈이 주변을 둘러보곤 했지만 유독 내가 바라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여기‘였다. 저 멀리 보이는 산도 보고,하늘도 보고 그 경계도 보고, 안개에 보이지 않는 뒷산의 여유로움에서 잠시 내 작업과도 비교해보며 많은걸 관찰할 수 있었다.
지식은 삶으로 이어져야 앎에서 지혜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과정은 시공간이 함께하는 현실이다. 소프트웨어로서 지식이 하드웨어의 물질적인 현실로 창조되는 삶의 과정인 동시에 지식으로서의 가치와 경험으로서의 가치가 덧붙여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과 예술가로서 재 정의는 내 삶의 가치관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잣대에 살이 덧붙는 소중한 경험이다. 불완전한 빈 공간을 소중한 경험으로 좋은 사람들과 조금씩 체우고 넉넉히 비워있는 공간도 즐길 수 있는 경험을 나눈다.
예술은 자연의 일원으로서 사람이 주체가 되는‘사람과 사람’이 함께하는‘삶과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은 기술이 아닌 인간적인 개개인으로서 경험과 지식의 다양함을 인정하고 포용하며 존중하는 삶이다. 삶은 예술이고 예술은 인정과 포용이며 존중이라 생각한다. 다름은 다름일 뿐이다. 틀린 것이 아니다. ‘틀리다‘라는 것도 사실은 애매하다. 개인적인 시각에 주관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세상엔 ’틀리다’라는 생각은 조심스러워야한다. 앎을 실천한다.
예술은 자연이다. 자연은 보호되어야할 차원에서 배워야할 차원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연은 보호되어야했다. 먹고살아야하는 인간에겐 자연은 소비되어야하는 물질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 자연은 보호 되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이었다. 나에게 자연은 스승이다. 자연스러움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아는 것’은 곧 스승인‘자연을 아는 것’이며 자연과 좀 더 가까워지려는 삶은 나를 아는것 만큼 조금씩 자연스러워져야 할 것이다.
현실과 멀리 동떨어져 사는 듯한 예술가는 틀린 삶을 사는 것이 아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며 문제에 한층 가까워지려는 예민함을 가졌을 뿐이고 답에 가까워지고픈 내적인 또 다른 욕망이 가득한 존재이지 않을까? 불완전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으며 그러기에 완전함을 향한 갈증을 가득 지닌 고독한 존재인 것이다. 불완전함을 느끼고 인정하며 답을 향한 갈증을 체우기 위해 잡히지 않는 오아시스를 향한 탐구자가 된다면 그 누구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민함을 탐구의 도구로 삼아 생태적인 환경과 소통하려는 용기와 끝없는 노력이 있다면 잡히지 않는 오아시스도 눈앞의 현실로 창조되거나 실현되지 않을까? 나는 본다. 이처럼 삶을 마주하고 치열하게 현실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딨는가? 다만 그들은 자연스럽지 않은 현실과 타협하려하지 않을 뿐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안에서 농촌의 삶은 내 삶을 예민하게 바라보게 된 시작이 되었다. 도시인으로서‘나’와 짧지만 자연과 가까웠던 농촌에서의‘내’삶을 비교하게 되었다. 도시에서의 내 경험적인 앎은 소중하다. 무언가 충분하지 않는 끝없는 갈증은 도시의 삶이기에 가능하다. 가능성은 기회를 낳고 꿈이 함께한다.
농촌에서의 삶은 진정 자연스러운 삶이 될 것인가? 농촌에서나 도시에서나 모든 삶을 존재로 포용한다. 곧 그곳의 삶이나 이곳의 삶이나 마찬가지다. 단 환경에 대한 예민함은 달라질 것이다.
지금 난 회색지대에 서있는 주변인이다. 역설이지만 내게 도시의 삶은 분명 자연스러움을 보기위해 시야를 희뿌옇게 흐려놓는 안개와 같다. 하지만 안개와 같은 시야를 바로보기위해 온 마음을 다한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내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지금은 그렇다. 내가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는 열정을 도시에서 찾는다. 앞으로 보게 될 환한 빛을 제대로 보기위해선 지금의 나를 바로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젠 조금씩 나를 통한 주변에서 세상으로 인식의 확장이 필요한때인 듯싶다. 수많게 맞닿는 삶들과의 작업도 스케일이 커지는 작업으로 가능해진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곧 지역민들의 삶을 살피게 되며 돌보게 된다. 소중한 나의 작업으로 껴안게 된다. 나에서 지역으로 확장되어진다. 확장되는 의식을 어떻게 현실화 되어야 할지는 조금 더 시간을 내어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세계적인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구글엔 이러한 프로그램이 있다. 인공위성으로 촬영된 지구의 모습에서 조금씩 확대되어 어느 나라의 건물까지 볼 수 있는 기능이다. 지구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지구를 천천히 확대, 축소하여 언제든 볼 수 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이었는데, 신기하다. 나에게도 이러한 프로그램이 필요한 듯싶다. 희뿌연 안개같은 눈앞의 현실에서 과거의 모습을 축소하여 보고 먼 미래를 확대하여 상상하는 것이다. 또한 내면의 존재에서 현실의 자아로 확대, 축소할 수 있는 기능이다. 내가 곧 자연임을 안다면 가깝게 내 주변 환경에서 나아가 지구의 소중함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이젠 앎을 조금씩 실천한다.
08.12.25
(여럿 블로그 관리중이라, 그곳에서 작업후기를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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