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표현으로 언어이든 그림이든 곧 정체성을 대신한다. 자신이 누구더란 질문은 표현되는 것에서 드러나므로 '나'보단 그렇게 드러난 것인 '네'를 통해서 더 잘 알 수 있다. '네'를 알기 위해선 나에 관한 시선이 없어야 하는데 자신이 누구더란 질문이 끈덕지게 있는 동안은 '네'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언어 혹은 시각이미지가 존재를 구성하는 집이라 생각하면 자신이 누구더란 질문보단 과연, 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란 질문으로 잇는게 옳을 것 같다.
내가 누구더란 질문은 구실을 찾기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구실이 없기 때문에 구실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 저기 구실로 자신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용은 있어도 의미는 없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네'를 보는 동안 난 그렇게 있다.
나는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돌아보았다. 현재뿐이었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현재 속에 들어박힌 가볍고 단단한 가구며, 탁자며, 침대며, 거울이 달린 양복장... 그리고 나 자신,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존재하는 것 그것이 현재였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 쟝-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프랑스)–1980),「구토La Nausée,1938」중에서
사르트르가 창조해 낸 책 속 주인공의 구토가 상징하는 바는 허무주의적인 실존을 대신한 것일 수 있다. 애초 삶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지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므로 그는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고 얘기했다. 이처럼 현실 속 삶을 꾸려가는 자유는 '나'에게 달려있더란 말이 의미가 있다. 자신을 비롯해 속박하는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찾는 것이다. 태어나기 이전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므로 선택을 위한 자유라는 건 여기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난 이후 주어진 현실에 자유가 있으므로 자유는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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