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뜨거워라, 강신주의 철학 [2014.02.24 제999호]
[기획1] ‘상담하는 철학’으로 하나의 현상이 된 강신주… 저잣거리의 말·생활인
입장의 강연에 대중 호응, ‘뜨겁고 빠른’ 인문학에 대한 비판도
신자유주의 반작용, 다른 길 가도 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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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코칭을 하는 양정훈(40)씨는 강신주의 팟캐스트 강연을 대부분 들었다. 양씨는 “2010년 처음 강신주 박사의 책을 접했을 땐, ‘철학에 대한 내공이 만만치 않다’고 느꼈지만 아주 대단한 저작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가 강신주를 좀더 특별하게 평가하게 된 것은 강연 때문이었다. “학자들이 책에서 좋은 이야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삶에서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강신주씨는 강연에서 현재 정부·여당 같은 현실 정치를 강하게 비판한다. 자신의 삶이 메시지가 되는 이들이 좋은 지식인 아닌가.”
대개의 강연에서 강신주는 자본주의와 권력에 맞서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을 키울 것을 강조한다. ‘힐링’에 대한 반작용이 그의 동력이 됐다. “1997년 IMF 위기 이후 퍼진 ‘부자 이데올로기’와 자기계발 담론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뒤 집값 버블과 함께 꺼진 것”이라고 권경우 문화사회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풀이했다. “너를 가혹하게 담금질해야 성공한다는 해법을 내놓던 멘토링과 달리, 강신주는 이 시대와 다른 길을 가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무조건적으로 전파되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나타난 일정한 반작용”이라는 분석이다.
그의 말은 그의 무기다. 강신주는 어려운 개념어를 쓰지 않는다. 오늘날 철학의 언어는 일상의 말로부터 너무 멀리 있다. 400년 전 유럽 근대철학의 문을 연 르네 데카르트조차 경계했던 일이다. 데카르트는 저작 <방법서설>을 당시 관례에 따라 라틴어로 쓰지 않고 프랑스어로 썼다. “부인들도 무엇인가 깨닫는 바 있고 가장 명민한 사람들 역시 그들의 주의를 기울일 만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였다. 그는 쉬운 언어로 철학을 전달하길 바랐다. “사물들에 관한 진리에 대해서 시골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자들보다도 더 잘 판단하게 해주는” 언어가 필요하다고 썼다.
강신주는 쉽다. 저잣거리의 말에 가깝다. 독자들이 꼽는 그의 최대 강점이다. 학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잠시나마 직장 생활을 했던 ‘생활인’의 경험이 배어 있기 때문일 테다. 직장인 배진선(37·가명)씨는 “어려운 건 질색”이었다. 직장 동료가 추천해준 라디오 방송 <색다른 상담소>의 철학자는 달랐다. 그는 의무와 도덕을, 배씨가 직장 생활과 결혼 생활에서 직접 고민할 수 있도록 거친 언어로 전했다.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긴 하지만 인문학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려운 말이 많아서 읽지 않았다”고 배씨는 말했다.
눈을 마주치며 주고받는 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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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말은 ‘위악’을 가장한다.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건 아이예요.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게 어른이에요.” “제일 싫어하는 말이 힐링이에요. 자기 맨얼굴을 봐야 해요. 그러기 위해 냉정하게 얘기해줘야 해요.” 1:1로 대화하며 상대방이 직접 무지를 깨닫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방법론으로 삼는다. ‘독설’이라는 범주로 진중권과 함께 묶일 법도 하다. 권경우 실장은 “진중권은 애당초 싸우기 위한 독설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스키를 타듯’ (싸움의 상대방들 사이로) 미끄러져 간다. 강신주는 주도권을 스스로 쥐고 있긴 하지만 상대방과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주고받는 방식의 독설”이라고 풀이했다.
그같은 ‘독설’의 경험은 상담자의 감정을 직접 자극한다.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이아름(26)씨는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 책들은 지적으로 만족감을 주지만 강신주씨의 말들은 아프다. 감정으로 다가온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강신주씨의 강연을 많이들 듣는다”고 전했다. 비교적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는 그에게도 본래 ‘철학자’란 세속으로부터 한 걸음 비껴난 존재와 같다. “일· 연애·꿈과 같이 막연한 주제를 두고 현실적인 철학과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는데, 그런 의미에서 강신주씨는 반세속인·반철학자 같은 느낌이다.”
강신주의 독설 화법은 대중이 열광하는 그의 무기인 동시에 숱한 ‘안티’들이 비호감으로 꼽는 요인이기도 하다. 돌직구와 막말의 경계를 쉼없이 넘나든다. “비루하게 살지 말고 차라리 (세상을) 떠나라”는 말은 철학적 반어에 가깝지만, 살아남은 자살자에 대해 “전문용어로 ‘설죽었다’고 한다”거나 “약을 한 80알 먹어야 하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정서적 가학이다. 철학적 충격은 숙의와 실천으로 이어지지만, 정서적 충격은 더 강한 자극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강신주의 강연을 반복적으로 찾아다니며 비슷한 상담을 거듭하는 일부 팬덤은 후자에 가깝다. 강신주의 강연을 ‘인문학의 탈을 쓴 또 다른 힐링(또는 킬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광신자들의 성령 부흥회?
스스로 현상이 된 철학자는, 또 다른 인문·사회학자들에겐 분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강신주 논쟁은 개인 블로그나 동호회 게시판부터 신문 지면까지 오르내리며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누군가는 강신주의 강연회장을 ‘성령 부흥회’(문강형준, <한겨레> 칼럼)에 빗댄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라”는 강신주의 강연장 또한 결국엔 “권위를 가진 자의 강력한 손길을 기대하는 어떤 노예적 태도”를 가진 대중으로 채워져 있다는 지적이다. 누군가는 그의 인문학이 ‘자아성형산업’(박권일, <미디어스> 칼럼)의 한 양태이며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 모색”을 하기보다는 “자기소외적인 현대사회의 상투성으로부터의 개인적 해방”만을 외친다고 분석한다.
시사평론가 김용민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반박한다. “구조적 고통을 개인의 성정 문제로 치환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 예리합니다. 그러나 강신주 비판 논리의 공허함은 여전합니다. 강신주 박사 강연에 호응하는 이들을 광신자 취급하는 태도가 불편합니다. 언젠가 한 교수님에게서 ‘인문학은 사람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공감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그저 하찮게 여기고 비웃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로부터 지식은 경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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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제기된 ‘인문학 위기’ 담론을 만들어낸 곳은 대학이다. 그사이 강신주를 비롯한 학교 밖 인문학자들은 대중 강연과 저술을 통해 꾸준히 역량과 명망을 쌓았다. ‘수유너머’ 같은 연구 공동체가 생겨났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안내하는 지침서로서 인문·사회 서적을 향한 대중적 관심은 오히려 뜨거워지고 있다. 문제는 ‘숙의’다. 철학은 “부주의하고 독단적인 방법에 의해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모든 사정을 살피고 우리들의 일상관념 속에 깃들어 있는 모든 애매함이나 혼란을 자각한 다음 비판적으로 대답하고자 하는 시도”(버트런드 러셀)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강신주와 더불어 ‘숙의’하고 있는가.
강신주와 더불어 ‘숙의’하고 있는가
<절망의 인문학>의 저자 오창은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는 “보다 깊은 책 읽기, 내면의 대화로 갈 수 있으려면 지금이 중요한 터닝포인트”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려의 목소리를 담아 말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인문학이 갑자기 너무 뜨거워지는 것이에요. 인문학은 지금처럼 모든 것이 빠른 시대에 차분한 자기 정립을 위한 관용과 인내의 관점을 줘야 합니다. 나를 위로해주는 수단이나 도구로 호명될 때 인문학은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촐처-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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