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이성에만 중심 두어 생각하는 건 편협하고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에 공감한다.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공간의 외연이 확장되고 교섭 가능해 지면서 경계가 점점 불분명해지는 게 사실이다. 말을 빌리자면 세상이 좋아진 거다. 좋아진 세상에서 일상적 고민을 심사숙고한 대가들의 이런 저런 번역된 이론들을 얕게나마 교차하고 빌려 가며 풀어내고자 하지만 그 마한 이론이 이론에서만 그치다 보면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하는 실존적 고민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져 '아는 것' 속에 내가 존재하게 되는 것과 같다. 정보의 노예가 되면 결국 현실적 내 삶은 스스로 선택한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민 된 정보들을 나름대로 의미 짓고 삶에 도움되는 결론으로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엔 '나'가 있는 사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자 박이문 선생님께선 '삶의 지도를 그리는 것'으로 비유한다. 삶의 지혜로서 철학과 학문적 철학은 엄연히 다르더란 이야기를 주목한다. 철학자라 하여도 자신 삶의 지도 그리기가 능숙한게 아니라는 말도 잇는다. 그럼에도 그 역할은 구분되어야하고 가치도 인정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예술가라 하여도 그 삶이 꼭 예술답지만은 않더라 생각하니 쉽게 공감되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예술하는 이가 예술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역할과 가치는 인정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삶의 지혜가 되는 철학으로 두 분이 하는 이야기는 보편적으로 번역된다. 과연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