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앤디는 그날 밤을 기다렸다. 포스터 뒤에 숨겨진 탈출구는 이미 수년에 걸쳐 완성되었고, 거세게 내리치는 빗줄기는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그런 완벽한 밤이었다. 그리고 긴 하수도를 지나 쇼생크 교도소를 저 멀리 두게 됐을 때 그는 울부짖었다. 프리덤! 그는 자유를 얻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 중에서
그런데 인간에게 자유는 가능한 것인가? 인간의 자유가 비단 교도소 밖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만은 아닐 것인데 말이다.
거미줄 쏘기
일찍이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자유를 '한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 말했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의 의미체계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체계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과거의 의미체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형식으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의 생산을 강제하는 힘은 우리 자신의 순수한 결단이라기보다 우리가 마주친 타자성에 가깝다. 기존의 의미를 뒤흔드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주체는 의미를 새롭게 생산하는 과제에 직면할 수 있다.
거미가 새로운 나뭇가지로 옮겨가는 과정을 바라본다. 우선 거미는 다른 나무를 향해 스스로 거미줄을 뿜을 것이다. 그러나 고요한 대기 속에서 거미줄은 허무하게 낙하한다. 그래도 거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거미줄을 뿜는다. 이때 우연히 불어온 바람이 거미줄을 옆 나뭇가지로 이어준다. 거미는 이어진 줄에 가만히 팔을 대고 가늠해 본다. 그리고 그곳이 자신이 옮겨갈 새로운 개척지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과감히 이전의 거미집을 버리고 새로운 거미집을 만들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사르트르 vs 알튀세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존재와 無』라는 책에서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 말했다. 그가 말하는 존재는 의자와 같이 그 본질이 물질에 선행하는 사물들이다. 그것들은 자유가 없다. 반면 인간은 미리 주어진 본질 따위는 없고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내는 '無'라 지칭했다.
인간을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로 보는 사르트르에게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는 '호명테제'의 반기를 내세운다. 인간이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에서 주입하는 이름을 획득하는데 그친다는 것이다. 봉건주의 사회에서의 여성과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노동자를 떠올려보면 현실에서의 인간이 사르트르의 생각처럼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이 타당성 있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로 확장된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자가 자본가가 된다고 그것을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 그저 노동자가 자본가의 역할로, 자본가가 노동자의 역할로 배역이 교체되는데 그친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자본주의 구조를 떠나 새로운 의미의 이데올로기 체계를 수용해 자신을 새로운 주체로 구성하게 됐을 때 얻어진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사르트르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자유, 돈
사르트르와 알튀세르. 이 두 철학자의 이야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비추어본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는 돈에 의해 지배당하고 돈의 질량이 자유의 진폭을 결정한다. 이 구조를 깨고 새로운 주체로서 자유를 획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국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노동을 거부하고 산으로 들로 떠나서 사냥과 채취만으로 살아간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실현하기 매우 어려운 일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미풍을 기다리며 거미줄을 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출처도 모를 바람이 슬쩍 불어오는 날에 새로운 주체인 나를 얻는 자유를 만날수도 있기 때문이다. |
|
|
|
|
참고강의 강신주, <철학 vs 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참고문헌 강신주, <철학 vs 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강신주, 그린비) |
written by mira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