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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4일 오후 07:41

오 창작소 2012. 2. 14. 19:42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에대한 연구에서 단순히 미시적,단편적 수준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개인과 사회 전체의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인의 구체적 삶은 사회의 기술발전 단계와 전체 구조에 의해 크게 제약되기 때문이다.

 

마페졸리!!

 

 


 

 

 

당연하게도 여기에서의 관찰자는 더이상 실증주의 과학의 초연한 입장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완전한 참여자도 아닌 것이다.그는 상응관계에 있다고 하자. 그는 분석하려고 하는 어떤 가치들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아마도 그것은 자기 반성에 부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일종의 "심층 사회학"과 관계가 된다. 여기에 관해 어떤 확증을 갖고 있진 못해도 우리는 사회과학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공범자'가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른바 '낭만적 사회학'에 관여하는 것이다. 사회의 이곳 저곳을 탐색하면서 그들은 많든 적든 그들 스스로 이미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대해 그의 저서 중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장에서 페라로티는 '상호작용으로서의 연대기'를 제시하고 있다. 개인연대기 그 자체가 경험임에 틀림없다는 것은 연대기가 '체험'을 고려하게끔 상정되기 때문이다.                                                                      - 미셸 마페졸리(1989), 일상생활의 사회학 : 인식론적 요소들 중에서 - 

 

한때 '일상생활의 사회학'이란 테마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일상생활연구회라는 것도 덩달아 국내에 생겨났던 기억이 있다) 이 테마의 두 '본좌'를 꼽으라면, 앙리 르페브르와 미셸 마페졸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르페브르가 현대의 기호와 언어를 통해 현대성을 규정하는 이미지들의 시선에 대한 해부를 놓치지 않았다면, 마페졸리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위한 사유의 방법과 틀을 제조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고 알고 있다. 사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두 본좌의 유명세를 비교하는 것은 흔한 '가십'일 수 있으나,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르페브르보다, 나는 마페졸리의 사고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라는 것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원딩' 초창기 시절, 그 시간에서 나온 고민의 어떤 형태를 마페졸리가 설명하는 구절들로 치유를 받았다고 할까? 그런 것에서 오는 감사함과 소중함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내가 '문화연구'라는 학문 사회 내 하나의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가장 신기하게 느꼈던 부분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 자체를 연구 주제로 삼을 수 있다니"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른바 '문화'라는 개념 아래 그 문화를 다룬 연구가 오늘날처럼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간은 사실 그리 길다고 볼 수는 없다. (문화연구적 수업의 특징일지 모르지만) 대학원에 들어온 사람들이 수업 시간에 자신의 하루를 나누고, 그 하루 안에 특징지워진 삶의 순간들을 공유한다는 것은 오늘날 너무 당연한 태도인 듯하지만, 여전히 신기하다. 자신이 잘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특징들, 자신이 늘 타고 다니는 지하철 내 풍경들, 요즘 고민하는 가족 내 문제들 등등이 수업 시간에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그것이 하나의 연구 논문으로 작성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는 "먹물로 뒤덮어진" 심층 에세이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이것은 학문과 그것을 마주치는 인간이 함께 노력하여 만든 우리 삶의 또 다른 행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수업 시간을 채우는 연구 동료들의 수다 안에서 나는 여전히 이론이 갖고 있는 중심이 그리웠고, 그 중심 안에서 이론이 나에게 던져주는 '소유하고 싶은 무거움'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사실 한창 공부하고, 수업을 열심히 듣던 시간에는 몰랐다가, 졸업 논문 관계로 약 1년을 학교 밖에서 지내면서,  밀폐된 내 방에서 연출되는 나와 나의 대화, 거기서 다시 내가 끄집어냈던 책이 <일상생활의 사회학>이었고, 그 중에서도 마페졸리의 부분을 반복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쉽게 쓰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몰랐던 게 '사회성'이란 것이었다. 마페졸리는 사회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일상생활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새삼 그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나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이 새로운 붆석형태라기보다 사물들에 대한 하나의 독특한 조망이라는 사실을 길게 설명한 적이 있다.(중략)그렇다고 이러한 관계들이 결코 존재한 일이 없다거나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장님이 아니고서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들 사회관계가 어떤 에토스, 그 속에서 현대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어떤 '에토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다. 이것은 내가 사회성이라 부르고자 제안한 것으로서, 사람들이 사회관계에서 최소한의 중요성을 가진 잔여요인으로 할 수 없이 인정하는, 단순한 사교성과는 매우 다른 어떤 것이다. 사회성은 유기적 연대,상징적 차원(커뮤니케이션)','비-논리적인 것',그리고 현재에의 관심을 포함한다.(중략) 우리에게 사회성이라는 주제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체계가 영속적인 상호작용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자연환경의 기반 내에서, 사회적 환경의 다양한 요소들 간에 항시 일어나는 역전성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일상생활의 사회학'에서 강조되는 것은 현상이며, 그리고 그 현상에 개입되는 지식이다. 지식은 단순히 사회를 바라보는 개입의 도구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고 하는 우리가 흔히 '진부함'으로 치부하는 것들을 거리를 두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연구의 방식이자 관점이 된다. (최근에 발간된 피터 버거의 책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피터 버거 역시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주창하던 이였고, 그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상식과 지식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마페졸리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에 접근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상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의 술자리 등에서 주고 받는 통속적인 지혜 그 자체가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감각이라고 주장한다.(그는 이 감각을 '사회적 전신감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사회성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사회 안에서 연결짓게 하는 일련의 방식을 의미한다. 마페졸리에게 그런 면에서 '사회성'이란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위한 '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페졸리는 알프레드 슈츠의 현상학적 사회학을 비롯해, 고프만이 펼쳐 놓았던 '연극무대로서의 삶과 의례'를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삶을 연구한다는 행복과 열정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내 해석이지만) 마페졸리는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정체성, 흔히 '역할 놀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비난의 차원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으로 접근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의 역사'를 쓰는 것은 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나오는 지혜, 그리고 매일 부딪히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잡담을 꾸준히 지켜보며, 거기서 사회의 묘미를 만끽하는 사람에게 솔깃할 듯한'제3의 장소'라는 개념은  이 개념을 주창한 사회학자 레이 올덴부르그의 재미있는 학술적 에세이를 지탱하는 힘이다. 집과 일터를 벗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술집, 카페, 식당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끼리 만날 수 있고, 전혀 모른 사람과의 영화적인 만남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제3의 장소'라고 불리는 이러한 공간의 소비를 통해 넓어진 사회적 관계를 체험한다. '제3의 장소'를 통해 사람들은 '이웃'의 발견을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이 주는 흥미가 쌓이면서, '제3의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즐기며 발설한다. 이 공간은 오히려 그 '누군가가' 많기 때문에 가능한 '나만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3의 장소'를 통해 마페졸리가 정의한 '사회성'을 체험하고 또 소비하면서, 그 공간에서 가능한 사회적 의례를 학습한다. 그리고 그 의례가 설정한 사회적 역할 놀이를 즐긴다. 여기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은 매일 정해진 것일수도 있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다발일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한 하루와 너무나 예상치 못한 하루. 그것이 사회니까. 오히려 이러한 진부한 설명 자체의 회피를 피할 수 없다는 것에서 나는 사회라는 것의 흥미를 느낀다.  

 

'진부해서 안된다'라는 강박에서 늘 헤메이던 시절, "그럼 진부함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나에게 마페졸리가 했던 조언은 "일단 새끼야, 진부함하고 부딪혀 봐"라고 지금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부함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다시 창조적 풍경으로 탈바꿈된다는 것. 그래서 나를 '일상적인 사람'으로 불러주는 친구들이  고맙다

 

 

 


http://3sang4.blog.me/40008954799

 


\위의 글은 나우누리 민예총 방에서 구해온 것입니다.


[115] 제목 : 일상성의 문제와 그 중요성 [시사저널]
올린이 : pac1 (민예총 ) 95/05/21 03:27 읽음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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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공시각 : 04/05 00:00
제목 : [문화] ‘일상’은 희망인가 절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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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의 삶에 대한 탐구 활발…“대중이 변해야 세계가 변한다”

횡단보도에서 손목시계를 한번 더 보고, 지하로 달려 내려가 승차권을
자동 개찰구에 넣으면 삼각 막대가 돌아간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7시 40분, 마음은 벌써 회사로 가 있다.
스케줄이 일렬로 늘어선다. 회의, 상담, 계약, 마감…. 몸은 만원
지하철 속에 있지만 마음은 벌써 저녁의 접대 자리에까지 가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이자
사상가인 자크 라캉은 말한 바 있다).

출근 시간의 지하철 내부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다. 사람은
짐짝처럼 채워져 있지만 기침소리와 신문 넘기는 소리밖에 없다.
라디오 소리도 없다. 밖으로 눈 둘 데도 없다. 차창에 비친 자기
모습이 그리 달갑지 않다. 지하철을 탄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들. 피곤에 지쳐 조는 사람들.

‘지금·여기’ 알아야 현대 사회 이해

출근길 지하철은 ‘너는 절대 앞지를 수 없다’와 ‘너는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니다’를 가르치는 것 같다. 지하철 역사를 빠져 나갈 때나
환승역 통로를 걸어갈 때, 앞 사람을 추월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속도와 흐름에 온전하게 몸을 맡겨야 한다. 또한 터져 나가려는 지하철
안에서 공동체의 미덕이나 인간의 존엄을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정시 도착’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오늘도 대중은 지하철을 타러
내려간다.

도시 대중은 ‘아,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지만,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중얼거린다. 밖으로,
과거로, 혹은 미래로 벗어나 버리고 싶다고. 그러나 대중은 한편으로는
지금·여기서 낙오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 ‘지금·여기’가 바로
일상, 일상성이다.

일찍이 2차대전 직후부터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는 일상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일상성 이론을 주창해온 프랑스의
좌파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세계일보>)을
우리말로 옮긴 박정자 교수(상명여대·불어교육과)는 “현대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일상성이란 단순한 일상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산업 사회의 도시적 특징”이라고 밝혔다.

최근 주경철 교수(서울대·서양사학과)가 아날 학파의 거두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Ⅰ-1 일상생활의 구조>(상·하,
‘까치’ 펴냄·아래 상자 기사 참조)를 출간한 것을 계기로 일상성에
대한 관심이 새삼 증폭되고 있다.

물론 브로델의 책이 나오기 전부터 일상성 연구는 있어 왔다. 지난
84년 국내에 처음으로 일상 생활에 대한 사회학적 논의를 제기한
박재환 교수(부산대·사회학과)를 필두로 92년 <문화과학>이 창간되고
뒤이어 출판사 ‘현실문화연구’의 시리즈물이 속간되는 한편,
<상상>과 <리뷰> 같은 계간지와 관련 학술 서적(번역) 출간이
잇따르면서 이 문화론은 가장 진보적인 이론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에 나온 <일상 생활의 사회학>(한울 아카데미)에서
박재환 교수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적 활동이 없다면 어떤
사건이나 역사도 일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일상 생활의
사회학’은 일상이라는 토대를 새롭게 조명하는 사회학이라고 적고
있다.

그동안 일상 생활은 철학·사상·역사· 사회학 등 모든 학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각 지대였다. 일상 생활의 사회학은 (아날 학파가
기존 역사학에 대하여 그러했던 것처럼) 기존 사회학에 대한
반성이었다. 박교수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사회학은 거창한 사건이나
구조에 지나친 관심을 가진 결과 구체적 현실과 삶을 조명하지 못했다.
역사학이나 마르크스주의에서 발원한 비판 이론도 일상성에 무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상 생활의 사회학과 문화론 사이에 걸쳐 있는 이론가가 앙리
르페브르이다. 그는 사회학 쪽에서는 미셸 마페졸리(프랑스 소르본
대학 사회학과 교수)와, 문화론에서는 알튀세르와 자주 비교된다.
르페브르는 일상성과 소외 문제에 주목하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포착하려고 하는 반면, 마페졸리는 일체의 이데올로기적 선입견을
배제하고 대중에게 신뢰를 표현한다. 마페졸리에 따르면, 진보
이데올로기는 그 정점에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대중은 이데올로기의
요구에 대하여 ‘단호한 무반응’과 ‘적극적 수동성’을 보인다.
마페졸리는 일상성에 대한 인정과 그 구체적 조명에 관심을 둔 것이다.

문학 평론가 도정일 교수(경희대·영문과)에 의하면, 르페브르는
알튀세르와 함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명백한 모순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는가. 어째서 생산력 발전이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를 소멸시키지 못했는가. 그들은 두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것이 60년대 프랑스에서 대두한
르페브르의 일상성 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다. 알튀세르는,
자본주의가 그 생산과 지배의 체제를 끊임없이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능력을 문화의 층위(이데올로기)에서 확보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일상성에 대한 사회학 쪽의 연구는 아직 형성 단계이지만 크게 보아
△일상에 대한 인식론적 고찰 △하루 24시간에 대한 접근 △일상
생활의 각종 의식에 관한 탐구 △사회 전체의 일상적 구조에 대한 조명
△일상성의 특징을 인간 존재의 내면적 반성과 연결하는 방법론 등으로
나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 또한 도시 일상과 현대성에 큰 관심을 가져 왔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지리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구동회·박영민 옮김, 한울 펴냄)에서 도시
일상과 대중의 인식 변화를 가져온 근본 원인은 시간과 공간의 압축
때문이라고 보았다. 자본의 회전 시간이 점점 빨라지면서 즉흥성과
순간성이 강조되고 공간과 장소가 급속하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대중은 자발적으로 예속당한 존재

역사가 미래로 가는 직선적 시간이라면 일상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간 구조라고 <일상 생활의 사회학>은 말한다. 현대 도시 대중의 삶은
일상이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일상은 대중이
그러하듯이 그 성격이 복잡하고 모호하고 또 모순적이다. 대중을
매체로 규정한 바 있는 김진석 교수(인하대·철학과)는 “일상이라는
나른한 문화를 살아가는 대중은 자발적인 예속 상태에 빠져 있다”면서
일상성 못지 않게 대중의 자발적 예속의 속성을 밝혀내는 일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무관심과 망각으로 인하여 전 지구가 당면한 위기와 비극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현대적 제도로서의 일상성은, 인간을 위한
변혁을 갈망하는 진영에게는 수렁이고 절망이다. 일상성에 관한 논의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확실한 것은 일상과 대중이 변하지 않는 한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일상의 특징=반복적,진부함, 그러나 실존이며 이론적으로 기재되지 않은 적나라한 삶, 이것은 변화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바꾸기 힘든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있다.

                  주기적 시간구조를 갖음, 발전과 역사라는 직선적 시간구조를 갖는반면 회귀,사소함,하찮은 주기적 시간구조를 갖는다.

                 일상의 1차적 요건은 생존과 존속의 메커니즘이라 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