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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6일 오전 03:35

오 창작소 2012. 2. 16. 03:36

몸과 우주를 공부하다

                                                                                                                                        인 디 언

 

 

  2월 둘째 주 일요일 감이당(남산강학원) 대중지성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지난 1년간 함께 공부하고 이제 2학년이 된 학인들과, 새롭게 합류한 1학년 학인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1학년은 따로 다른 날 한반이 진행되는데 시간이 안 맞는 분들이 우리와 합류해서 1, 2학년 과정을 바꾸어 공부한단다. 2학년 먼저하고 1학년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방식을 생각해낸 것도 참 재미있다.) 감이당 대중지성은 한의학과 글쓰기를 결합한 의역학 공부과정으로 1년씩 3년간 지속된다. 이제 2년차인 나는 마치 학교 다니는 학생처럼 일주일에 이틀을 감이당으로 공부하러 다닌다.

  의역학을 처음 접한 것은 2년 전 도담샘의 사주명리학 강좌를 통해서였다. 우응순샘의 고전강좌에 이은 문탁의 초창기 강좌였다. 그 후 기초한의학, 동의보감 등의 강좌가 이어졌고 강의를 지속적으로 들으면서 의역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 공부하러 감이당까지 멀리 다니는 맛도 괜찮았지만 사실은 문탁에서 공부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싶었다. 그 바람과 관심이 모아져 지난 1월 문탁에서도 인문의역학 세미나를 시작했다.

  의역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긴다. 인문학 공부한다면서 웬 한의학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의역학이 뭐지? 지금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몸과 우주에 대한 공부, 그것이 의역학이라고. 그리고 나는 의역학을 공부하고 있다.

 

 

새로운 배움의 시공간

 

  이 글을 쓰려고 작년 한 해 동안 공부하면서 적은 노트를 꺼내보니 얄팍한 노트가 모두 6권이다. 주로 글쓰기 강의 내용과 강의 전 책 읽으며 적어둔 내 나름의 밑줄 친 문장들, 그리고 내가 외웠던 시들이 적혀있다. 매주 시험 볼 내용을 정리한 독서카드도 꽤 된다. 그 내용은 지금 다시 봐도 새롭기만 하다.^^ 그리고 4편의 에세이. 이건 좀 숨겨두고 싶다.^^

그동안 찔끔찔끔 해오던 공부를 좀 더 긴 호흡으로 할 수 있겠다 싶어 시작한 감이당 대중지성. 특히 글쓰기가 안 되는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았다. 함께 하는 학인들은 참 다양했다. 20대 초반의 딸 친구도 있고 고등학교 2년 후배도 만났다. 직장생활 하는 중년남자도 있고, 백수 청년도 있다. 난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한다. 아마 두 번째? 그럼에도 나이를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렇게 세대를 가로질러 함께 공부하는 경험은 참 새롭다.

  새로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도담샘은 무조건 외우라는 주문을 했다.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외우라는 거야? 뭘 좀 알려주고 외우라고 하면 안 되나? 그래도 열심히 하는 건 잘하는 터라 일단 하라는 대로 외우고 또 외웠다. 설거지 하면서도 중얼중얼, 운전하면서도 중얼중얼, 독서카드에 정리해 언제 어디서나 갖고 다니며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재미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물론 그것을 외우는 것도 신선했다. 공부가 자연스러운 원초적인 본능이라더니 정말 그런가?

  그러나 역시 글쓰기는 엄청난 스트레스. 첫 학기 에세이를 쓸 때는 허리가 아파 일주일동안 못 움직일 정도였다. 이를 핑계로 피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몇 줄 쓰고 누워있다 다시 몇 줄 쓰고 하면서 글을 썼다. 그리고 아픈 허리로 30명이 에세이를 발표하는 이틀을 버텼다. 순간순간 집에 갈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시공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게 또 다른 새로운 배움의 시공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함께 읽고 나누는 동안 내가 몰랐던 세계가 펼쳐지기도 했고, 누구나 넘어지는 문턱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볼 수 있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글을 통해 그들이 보였고 그들을 통해 내가 보였다. 아마 그날의 감동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3학기 에세이는 글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다. 도저히 차서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 때는 세 사람이 함께 밴드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같은 멤버들이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어떻게든 쓸 수 있도록 함께 이야기하고 격려했다. 덕분에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날림으로 썼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니 그 학기에 텍스트를 꼼꼼히 읽지 못했다. 그러니 내 삶과 텍스트를 연결 지을 수가 없었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결과였다. 덕분에 4학기 때는 내가 쓰고자 한 에세이 주제의 텍스트를 잘 읽을 수 있었고, 내 눈으로 분석한 글쓰기를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시간에 쫒기지 않고 글을 올렸다.

  4번의 글쓰기를 통해 배운 것은 시간 지키기, 자기 눈으로 보기, 텍스트 제대로 읽기, 밴드 글쓰기의 힘 등이었다. 이제는 잘 쓰려고 하기보다 그냥 쓴다.

  새로운 공부는 나에게 그렇게 왔다. 유능해지기 위한 공부가 아닌 삶을 알아가는 공부. 다른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공부. 공부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특별한 목표가 있지 않은, 공부 그 자체로서의 공부. 낭송하고 외우고 시험보고, 책 읽고 고민하고 글 쓰고, 그렇게 함께 하면서 그 안에 있는 것 자체가 배움이고 공부였다.

 

 

단순해진 일상

 

  의역학 즉, 몸과 우주를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깨닫는 것은 몸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원인-결과로서가 아니다. 칠정(마음)이 병(몸)의 원인이고,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감정과 병이 함께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과관계가 아니라 공시성!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우주)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몸과 마음의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공시적인 대응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세미나를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이게 언제 어떻게 내 인생하고 연결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의역학은 그런 면에서 참 명쾌하다. 가장 원리적인 것을 공부하면서도 가장 실용적이다. 원리를 배우면 오늘 무엇을 할 지 알게 된다.

덕분에 내 일상은 많이 단순해졌다. 일어나서 밥 먹고 책 읽고, 밥하고 세미나하고 숙제 외우고 산에 가고, 작업장 일하고 발제하고 피곤하면 좀 자고... 하는 일은 많지만 일상은 단순하다. 쓸데없이 사람 만나서 별 의미도 없는 이야기 하는 일 거의 없고(사실 그럴 시간이 전혀 없다), 이번 학기에는 10년 넘게 하던 강의도 접었다. 돌아보니 어느새 매너리즘에 빠진 채로 별 감동없이 강의를 하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그 강의를 통해 배우는 것이 없었다. 일상 자체가 나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배움이고 공부인데 그러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기 수련으로서의 공부

 

  의역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병이 없으면 태어날 수도 없다. 또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병을 앓는다. 그런 점에서 병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병과 더불어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 것은 병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회복)이 아니라 병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변화된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구체적 일상에서는 음식, 운동, 칠정과 관계, 이것들이 몸과 마음의 병과 관계가 깊다. 따라서 몸이 아프면 식습관을 바꾸고 운동을 하고 감정의 흐름을 살피고 적당한 수준에서 일을 하면서 관계를 돌아보아야 한다.

  나도 병을 통해서 내 몸을, 내 감정을 보고 느끼는 법을 배웠다. 지난 가을 ‘사주명리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몸과 마음을 어떻게 쓰고 살고 있는지 좀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어디에서 걸려 넘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내 몸은 병을 앓고 치료과정을 거치면서 많이 달라졌다.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화된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변화된 삶이, 일상이 필요하다. 똑 같은 패턴으로 반복하지 않고 다르게 차이를 내면서 살아가는 것이 수행이고 수련이다. 그것은 나에게 공부와 다르지 않다.

  의역학적 글쓰기는 몸과 글 사이에 간격이 없다고 한다. 앎과 삶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공산당선언을 쓴 맑스나 마음(칠정)의 행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추적한 니체(도덕의 계보학), 그의 시에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박노해(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게서 의역학적 사유의 길을 배우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감이당 대중지성 첫 번째 에세이에 쓴 글은 지금도 내게 유효하다.

 

나의 욕망의 배치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 ‘가슴에 약탈의 총을 품고’ 살면서 세상이 ‘심심 한 놀이터’가 되기를 바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프게 새긴다. ‘인생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건너뛴 본질적인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는 박노해 시에서 인용)

습을 바꾸기 위해 안하던 것-공부에 집중하기, 잘 못 쓴 글로 그대로 나를 드러내기-을 해보리라. 뭔가를 시작하는 것이 발심(發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발심은 무언가를 시작하 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운을 끊고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깊이 있게 나를 들 여다보는 것이다.

 

 

 


 

 

이곳에선 정말 공부할 맛 나겠다~ 우왕..

유독 일상이란 텍스트가 자연스럽게 더 와닿네..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