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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와핑 프로젝트

오 창작소 2010. 9. 25. 23:05

영국 런던의 복합문화공간 ‘더 와핑 프로젝트’

 

영국 런던의 ‘더 와핑 프로젝트’(이하 와핑)는 흥미로운 장소다. 갤러리와 식당이 한 공간에 있는 와핑은 언뜻 보기엔 요즘 한창 유행인 ‘복합문화공간’과 별다를 바 없다. 갤러리에선 패션 관련 사진전·미술전이 열리고 1층에 자리한 식당 ‘와핑 푸드’엔 런던의 트렌드 세터들이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여느 복합문화공간과는 다른 점이 있다. 녹색·하양·검정으로 된 최신식 디자인의 의자·테이블 사이로 군데군데 기름때 낀 커다란 기계들이 놓여 있다. 1890년 세워져 거의 100년 동안 런던 시내 고급 호텔과 극장의 엘리베이터에 발전기용 물을 대던 장치다. 와핑이 들어선 곳은 ‘세계 최초의 발전기용 물 공급 공장’ 자리다. 공장 터에 와핑을 새로 지은 게 아니라 19세기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 채 갤러리와 식당을 들였다. 그 안에 있던 기계 장치들도 그대로 남겨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재미난 공간으로 꾸몄다. 새로운 개념의 장소를 놓칠 리 없는 패션 잡지 보그 이탈리아판은 여기에서 패션 화보를 찍었다. 인디펜던트나 이브닝 스탠더드 같은 영국 언론과 영국 관광청은 와핑을 ‘런던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곳’으로 추천한다. ‘와핑 푸드’는 영국 언론이 ‘영국 톱10 레스토랑’으로 꼽는 곳이다.

1 ‘와핑 푸드’는 1890년 지은 공장 모습을 거의 그대로 남겨둔 채 의자와 테이블만 들여 놓아 꾸민 식당이다.
2 ‘더 와핑 프로젝트’에선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각종 전시가 열린다. 건물 밖 마당에서 열린사진전 모습이다.
3 주 건물 옥상에는 템스 강이 보이는 조망용 옥상이 있다. 밤엔 조명이 들어오고 영상 전시물이 상영되기도 한다.
4 지난달 지하 갤러리에서 열린 조각가 조너선 엘러리의 전시. 와핑에선 1년 내내 기획 전시가 열린다. 입장료는 대개 무료다.
5 와핑 1층에 있는 식당 ‘와핑 푸드’에서 지하 갤러리로 통하는 입구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샹들리에와 현대적인 식탁·의자가 옛날 기계 장치와 묘하게 어울다.
호주 출신 아트 디렉터 줄스 라이트의 작품

낡은 19세기 공장을 트렌드 세터의 집결지로 만든 이는 영국인이 아니라 호주 출신의 줄스 라이트 박사다. 그는 “오래된 유적을 보존만 한다면 박물관과 다를 게 뭐냐”며 “감각적인 공간으로 거듭나게 한다면 얼마든지 현대와 공존하는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라이트 박사를 지난달 15일 오후 와핑 푸드에서 만났다. 그리고 제일 먼저 와핑이 트렌드 세터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물었다.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곳이라서 그럴 겁니다. 중요한 건 과거를 어떻게 현재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재 혹은 미래는 만들 수 있지만 과거는 만들 수 없잖아요. 창조할 수 없는 과거를 보존하면서 거기에 현대적 상상력을 더한 게 성공의 이유라고 생각해요.”

녹슨 기계, 샹들리에도 멋진 인테리어

‘더 와핑 프로젝트’ 대표 줄스 라이트 박사.
와핑 푸드 천장엔 귀족 저택에나 어울릴 법한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그의 설명이 아니라면 생뚱맞은 장식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다. 하지만 거대한 기계 장치가 와핑 푸드만의 색다른 인테리어라서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샹들리에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템스 강변이 바라다 보이는 와핑이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1993년의 일이다. “영국 TV 채널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할 때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여길 처음 알게 됐어요. 템스 강변의 멋진 풍경과 19세기 공장 건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죠. 그때부터 ‘아 저기엔 갤러리를 넣고 여긴 이렇게 꾸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왜 열심히 했느냐고요? 예술가들이 뭔가 영감을 얻을 만한 장소로는 딱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결국 요즘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창의력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찾는 장소가 됐네요.”

레스토랑으로 변한 와핑 1층 안쪽 커다란 철문을 지나면 갤러리로 통하는 계단이 나온다. 지하에 마련된 갤러리 공간이다. 120년 전 붉은 벽돌이 그대로 보존된 널찍한 창고 같은 지하실 벽엔 각종 미술품이 걸려 있고 천장에 설치한 조명이 예술품을 비추고 있었다. 전시 공간엔 트렌드 세터로 보이는 젊은이뿐만 아니라 아이 손을 잡고 온 가족 단위 관람객들도 눈에 띄었다.

“갤러리를 따로 꾸밀 필요가 없어요. 우린 전시 내용에 따라 조명만 달리 연출하면 돼요. 그리고 입구 표지판에서 ‘여긴 이런 시설이 있었던 역사적인 곳이다’로 설명하면 되죠. 물론 여긴 갤러리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에요. 이 건물이어서 가능한, 그래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죠.”

한국의 오래된 건물도 헐지 말고 재창조를

그는 ‘잉글리시 헤리티지’(스톤 헨지 등 영국 문화 유적의 보존·관리 등을 맡고 있는 공적 단체)의 지원을 받아 이곳을 사들이고 새로 꾸미는 데 7년이란 시간을 쏟아 부었다. 개보수 비용만도 400만 파운드(약 76억원)가 들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의 지원금과 라이트 박사가 모금한 돈을 합쳐서다. 건물을 헐어내 최신식 아파트를 지으려던 원 소유주와 소송까지 벌여 가며 건물을 사들이고 막대한 금액을 들여 이런 공간을 꾸민 이유를 물었다.

“와핑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곳입니다. 한국에도 낡은 수력 발전소, 낡은 공장들이 있다면서요. 그걸 밀어 버리고 새 건물을 짓는 게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상력·창의력, 또 이런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가 꽃피려면 재미난 영감 충전의 공간이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오래된 건물이라고 무조건 헐어 낼 게 아니라 ‘재창조’를 할 생각으로 접근하는 게 중요해요. 한국에 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면 불러 주세요.”

런던=강승민 기자


‘더 와핑 프로젝트’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와핑 홈페이지(www.thewappingproject.com)와 영국 관광청(www.visitbritain.co.kr)에서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