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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재앙 앞에서 '진짜로' 살아남는 방법은

오 창작소 2013. 10. 12. 17:17

 

[프레시안 books]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팀장 

 

1.
사상서 혹은 비평서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책의 주제나 내용, 심지어 저자도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책이 언제, 어떤 시점에, 무엇에 대한 응답으로 쓰였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의 신예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의 저작은 모두 세 권이 한국에 번역되었고 한 권이 번역 중이다. 일본 출간일 순으로 나열하자면 <야전과 영원>(2008, 번역 중),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2010, 한국어판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사상으로서의 3.11>(2011, 쓰루미 슌스케 등과 공저, 한국어판 윤여일 옮김, 그린비 펴냄), <이 치열한 무력을>(2012, 한국어판 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순이다. 하나의 시점을 기준으로 그의 책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에 나온 책과 그 이후에 나온 책이다.

▲ <이 치열한 무력을>(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나온 사사키 아타루의 모든 글과 책들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그의 응답으로 읽혀야 한다. '책을 읽고 쓴다는 혁명'에 대한 야심찬 주장 덕분에 한국에서도 그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고, 그에 대한 낭만적 찬사와 동시에 '나이브하다'라는 비판도 많지만, 이 명백한 사실에 주목하는 독자나 비평가는 거의 없다. 그 탓에 사사키 아타루에 대한 수용은 관념적 차원에, 그리 혁명적일 것도 없는 독서론 차원에만 머무르고 있는 듯하다.

독서론이나 문학론으로 지레 파악한 채 사사키 아타루의 책 <이 치열한 무력을>(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을 읽는다면 그 어떤 '실감'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핵발전소 사고라는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책을 읽는다면 타국 비평가의 그저 그런 에세이, 대담 모음집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때 "인문학의 만찬"이나 "천재성"이나 "즐거움" 같은 흔한 말은 접어두기로 하자.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완만한 죽음' 속에 살고 있는, 그것에 대해 온몸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들은 너무나 평화롭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명확하게 생각하자.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라는 구체적인 재앙에 대하여.

 

 

 

 

 


2.

▲ <사상으로서의 3.11>(쓰루미 슌스케 외 지음, 윤여일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사사키 아타루는 '3.11의 사상가'이다. 이것은 느닷없는 표현이 아니다. 사사키 아타루를 가장 먼저 한국에 소개한 책이 이미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상으로서의 3.11>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사상으로서의 3.11>의 첫 꼭지에 실린 사사키 아타루의 글은 "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2011년 4월 15일 강연)이다. 이후 사사키 아타루의 모든 행보는 이 글로부터 시작되며 또한 이 글에서부터 취한 태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가 던진 화두는 이런 것이다. '바스러진 대지 위에 어떻게 다시 살아갈 장소를 만들 것인가?'

"도망칠 곳은 없고 탈출도 없고 출구도 이탈도 없습니다. 어느 곳으로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지금 여기서 부서진 대지-근거를 새로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더럽혀져 있다고 하더라도. 살 수 있는 근거를 새롭게 찾아내기 위해 이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방사능 누출 사고로부터는 '탈주'할 수 없다. 그저 정부나 책임자만을 비난하는 것, 대책 없이 비판만 늘어놓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폐허 위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몸짓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자신이 던진 화두에 대한 답을 <이 치열한 무력을>에서 보여주고자 한다.

<이 치열한 무력을>은 무척 추상적인 이야기, 언어의 탄생에 대한 세 명의 좌담 '말이 태어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우선은 약간의 우회로다.

언어에 대해서라면 늘 들을 수 있는 빤한 논리가 있다. "말은 죽은 것이고, 그 바깥에 말로 할 수 없는 생생한 체험이 있다"는 논리다. 여기에 말이 아니라 예술이나 문학, 책을 대입해도 결과는 같다. 이 논리는 말과 삶, 혹은 말과 사물 사이에 절대적 분리선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사키 아타루는 '언어'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나눠 생각하는 이분법을 그만두자고 말한다. 왜 그런가. 말과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말과 삶 모두를 그저 그 자신과 동일한 것에만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 반대다. 말의 내부에는 삶이 놓여 있고 삶의 내부에는 말이 놓여 있다. 말과 삶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부와 외부를 나눌 수 없는 하나의 평면 위에 있는 것이다.

진부한 철학적 성찰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사키 아타루의 이런 태도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의 언어에 '안주'하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언어로부터의 탈주에도 안주에도 만족할 수 없다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삶을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책세상 펴냄)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어떤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의 삶의 양식을 상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진정한 마르크스적 행위, 혁명적 행위란 무엇일까? 데모일까? 혹은 마르크스의 저서들에 대한 주해일까?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을 쓰는 것, 곧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마르크스적 행위, 혁명적 행위라고 말이다.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 시기에 <자본론> 제1권을 냅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해체되고, 이후 마르크스는 간접적인 형태로만 실천에 관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본론>을 계속 써나간 것 자체가 '실천'이거든요. 대영 도서관에 틀어박혀 레모네이드와 싸구려 시가를 빨아대면서 <자본론>을 쓰던 시기에 훨씬 큰 '실천'을 하고 있었던 거죠."

이 예가 다소 고리타분하다면 최신의 예를 들어도 좋겠다. 예컨대 푸코는 <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오트르망 옮김, 난장 펴냄)에서 독일, 프랑스, 미국의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나치즘 시대부터 전후에 걸쳐 무엇을 했는지를 그 기원에서부터 치밀하게 분석한다. 당시 그들은 읽고 쓰고 새로운 이론을,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를 뒤바꾼 '신자유주의 혁명'이란 그들이 쓴 글과 책들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자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책을 읽고 쓴다는 혁명'을 믿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3.
<이 치열한 무력을>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책의 중반부부터 시작된다. 말에 관한 우회로에서 시작하여 책과 연애와 철학과 소설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로 이어지던 대담은 심각한 눈앞의 현실 속으로 진지하게 치닫는다.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 '"우리의 제정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를 요약한 기본 주기 21개' 같은 글과, 그 뒤로 이어지는 다카하시 겐이치로, 후루이 요시키치와의 대담은 깊고 무겁고 무척이나 뜨겁다. 그것들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바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글들은 선동을 위한 것이 아니다. 3.11 이후에 모든 게 바뀌었다면서 이 위기의 순간을 특권화하고 무언가 다른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사사키 아타루는 3.11 '이후'라는 생각 자체를 문제시한다.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기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핵발전소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 돌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사사키 아타루는 이것을 "우리의 치욕"이고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이 대지진, 이 재해, 이 사태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치욕입니다. 우리의 손도 더러워졌다는 겁니다. '예상 밖'이라는 말은 변명에 불과한 것이, 이미 이 정도 지진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미리 조사해놓은 자료도 있었습니다. (…) 그런데도 우리는 이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누군가가 잘하겠지, 누군가가 제대로 바꿔주겠지'라는 생각은 유아기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의 이 세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문학, 예술, 사상은 얼마나 무력해 보이는가?

사사키 아타루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대체 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정부 관료들, 도쿄 전력 사람들, 원자로를 만든 회사, 매스컴, 인터넷, 심지어는 세계 각지에서 계속 실패하고 있는 미군까지. 그들 모두가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무력했다. 문학이나 예술만 특별히 무력한 것이 아니다. 이 무력함이야말로 '현실'이다.

다시 묻자.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무엇이었는가? 소설가 후루이 요시키치는 사사키 아타루와의 대담에서 그 답을 간명하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영위해온 생활이 낳은 결과 중 하나인 거죠."

요컨대 이런 것이다. 우리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그와 관련된 책임자들 그리고 방사능 누출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의심하지만, 그러한 체계를 지탱하는 우리의 '생활'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현재의 안락한 생활의 안정성을 추구하려 할 때만이 핵발전소의 운영은 정당화되고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생활의 자의성을, 나아가 언어의 자의성을 의심하지 않기에 그 무근거한 생활의 안정은 '핵발전소라는 환상' 속에서 계속되는 듯 보인다. 언젠가 닥쳐올 재해를 은폐하면서.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삶의 자의성, 언어의 자의성을 직조하는 문학과 예술이 성취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다. 아니, 있을 수밖에 없다. 말이 계속되는 한, 삶이 계속되는 한은.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도 한 사사키 아타루는 이 책에서 여러 번 소설의 정의를 묻고 답한다. 그에게 소설은 "과거를 미래로 만드는, '지금 여기'를 변화시키고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자 "타자로부터 유래한 언어이자, 타자에게 보내는 언어이며, 타자의 세계관이고, 묘사하는 자신의 말조차 타자의 말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변환, 곧 삶의 변환을 위해서 작동하는 것이고, 오직 그럴 때만이 문학이라 불릴 만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이 치열한 언어를, 이 치열한 무력을.

4.

▲ 사사키 아타루. ⓒwww.atarusasaki.net

사족을 붙이자면, 요즘 사사키 아타루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있다. 11월에 일본에서 출간되는 그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재앙의 날로부터 2년.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남자는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카구치 안고의 후계자로 주목받는 저자가 장려한 문체를 구사해 도달한 '포스트 재해' 연애 소설." 한국어 번역판을 읽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마지막으로 <이 치열한 무력을>이 핵폐기물에 관한 음악으로 끝난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힙합의 대부' 길 스콧 헤론의 <We Almost Lost Detroit>(우리는 거의 디트로이트를 잃을 뻔했다)가 그것이다. 1966년 디트로이트에 있던 핵발전소 페르미 1호가 노심 용해 사고를 일으킨 것에 대한 저항곡으로 쓰인 아름다운 노래다.

어쩌면 사사키 아타루는 "We Almost Lost Fukushima"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가 박솔뫼는 '겨울의 눈빛'이라는 단편소설에서 해운대와 약 2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고리 원전에 사고가 발생하여 해운대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이 된 가상의 상황을 그려냈다. "We Almost Lost Haeundae"가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