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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오 창작소 2013. 11. 4. 16:42

 

[삶의 향기] 고 뒤랑, 위대한 종합정신의 소유자

 

[중앙일보] 입력 2013.02.07 00:14 / 수정 2013.02.07 00:14

 

 

진형준
홍익대 교수·불문과

 

뒤랑(G. Durand ) 선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뵌 것이 벌써 20여 년이 되었다. 1991년 여름,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도시 스리지 라살에 있는 어느 성(城)에서였다. 그날부터 8일간 그곳에서는 뒤랑 선생의 저술들을 테마로 한 국제 학술대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다.

 첫 날, 뒤랑 선생은 나를 비롯한 한국에서 온 일행들을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뒤랑 선생의 『상징적 상상력』이라는 작은 책자를 이미 번역해 소개한 바 있으며 뒤랑 선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전날만 해도 우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조금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시던 뒤랑 선생의 태도가 싹 바뀐 것이다. 나를 멀리서 보고는 ‘사바(안녕)’라는 인사를 미소와 함께 건넨 후 외면하듯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뒤랑 선생의 수제자이자 나를 상상력 공부로 이끄신 유평근 선생의 서신 탓이었다. 전날 뒤랑 선생에게 내가 전해준 그 서신에 ‘그 친구, 프랑스에 처음 가봅니다. 그래서 불어를 잘 못해요’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뒤랑 선생이 ‘안녕!’하는 인사만 건네고 나를 피한 것은 불어를 잘못하는 나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안 그러셔도 되었는데….

 뒤랑 선생은 그만큼 자상하신 분이었다. 뛰어난 학자이면서 동시에 자상한 정을 지닌,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그런 사람이 바로 뒤랑 선생이었다.

 프랑스 지식인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덧붙이자. 프랑스, 특히 파리 지식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표현이 하나 있다. 바로 ‘나의 스승(mon ma<00EE>tre) 아무개’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뒤랑 선생은 자신의 글에서 바슐라르(G. Bachelard)의 이름을 언급하게 될 때면 어김없이 ‘나의 스승 바슐라르’라는 표현을 썼다.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룩한 바슐라르를 이어받아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이라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뒤랑 선생은 그런 분이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내세워야 행세할 수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프랑스 지식인들은 ‘나의 스승 아무개’라는 표현을 쓸 줄 모른다. 그들에게는 스승도 경쟁대상일 뿐이다. 바슐라르를 언제나 ‘나의 스승’이라고 부른 뒤랑 선생은 이제 나의 마음속 스승이 되었다.

 대학원 시절, 처음 뒤랑 선생의 그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매료되었었다. 뒤랑 선생의 『신화방법론 서설』이라는 책의 발문에서 카즈나브(M. Cazenave)는 뒤랑 선생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책’이라기보다는 ‘광활한 길’이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썼다. 그는 “뒤랑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던가!”라고 썼다. 또한 “뒤랑 덕분에 온갖 빗장들을 건너뛸 수 있었고, 창문을 열어 드넓은 대지의 신선한 공기를 맞아들일 수 있었고, 지도 위에 그저 흰색으로만 표시되어 있던 미지의 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썼다. 뒤랑 선생에게 처음 매료되었을 때의 내 심정이 바로 그러했다.

 ‘인간에 관한 한 그 어느 것도 낯설지 않다’고 말하는 뒤랑 선생은 위대한 종합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 정신을 통해 나는 크게 보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상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상상력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30년 넘게 씨름하면서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누가 물으면 “사람답게 사는 법 겨우 배운 거지요”라고 답하게 된 것도 비교적 열심히 뒤랑 선생의 뒤를 따른 덕분일 것이다.

 그분이 지난해 12월 7일, 91세를 일기로 고향 근처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당신의 의도대로 알프스 지역의 좋은 공기를 맞으며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이 시대 최고의 거인 한 분이 그분의 인격에 걸맞게 그렇게 조용히 가셨다.

 내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빚진 스승을 떠나보내며 나마저도 그렇게 마냥 조용히 있을 수 없어 이렇게나마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스승님, 편히 눈감으세요. 스승님이 열어놓으신 길을 뒤따르는 제자들이 그래도 꽤 있으니까요.

진 형 준 홍익대 교수·불문과

 ◆필자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불문학 박사를 받은 뒤 1984년부터 줄곧 홍익대 강단에 서왔다.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홍익대 문과대학장을 지냈고 한국상상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상상력혁명』 『공자님의 상상력』 『이미지』 등의 저서가 있다.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신동아]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질베르 뒤랑 지음/진형준 옮김/문학동네/712쪽/3만8000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질베르 뒤랑(1921~)이 근 50년 전에 출간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이 한국어 번역 작업 11년 만에 마침내 홍익대 진형준 교수에 의해 완역됐다. 그간 여러 사정이 있었겠으나 한 권의 인문서적을 11년 동안 붙들고 인내한 출판사의 노고도 치하할 일이고, 번역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읽기가 쉬운 책은 아닐 거라고 독자도 미루어 짐작할 것이다.

사실 상상력 연구의 고전(古典)으로 알려진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은 단숨에 읽히는 책이 아니다. 특히 20세기에 이르러 이미지와 상상력의 발견에 공헌한 사상가들의 편력과 연구 방법을 소개하는 서론 부분은, 생소한 고유명사와 더불어 종교, 민속학, 상징학, 심리학, 철학을 아우르는 다양한 개념이 자칫 독자의 기를 꺾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책 전체가 난삽하다는 말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소위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대개 단거리 경주용이 아닌 마라톤용이다. 일단 준비 과정이 필요하고 적절한 호흡법도 필요하다. 그래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닥치지만 이겨내야 한다.

 

충동과 억압을 넘나드는 상상력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은 1960년대 프랑스 구조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질베르 뒤랑이 추구하는 구조주의 방법은 다른 구조주의자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우선 인간의 상상력이 자유롭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믿고 상상력의 절대성 및 자주성을 주장하는 자신의 스승 바슐라르의 뒤를 따르면서도, 바슐라르의 현상학이 시의 현상학에 국한된다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시와 과학을 감싸는 상상력의 힘을 강조하며, 레비스트로스가 행한 신화의 구조 연구에 매혹을 느끼면서 동시에 신화의 의미 연구를 등한시하지 않는다. 형식적 구조주의와 역사적인 연구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뒤랑이 보기에 하나의 이미지는 결코 하나의 기호가 아니다. 하나의 이미지는 물질적으로 의미를 지니며, 그 이미지는 각각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 상징성은 인간이 진화해온 환경과 인간 정신 고유의 특성이 낳은 산물이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이미지의 세계는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현실, 사회 구조, 여성의 다산성이나 남성의 힘에 대한 의식 등 지각의 모든 객관적 여건이 내면 깊은 곳의 충동과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다.

심리학적 표현을 빌리면 충동과, 억압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실, 이 두 차원 사이를 상상력이 끊임없이 왕복하는데, 뒤랑은 이 정신적 움직임의 궤적을 인류학적으로 따라간다. 그래서 인간 활동 전반에 걸쳐 이미지를 관찰하고, 정신분석, 의례와 제도, 종교와 상징, 시와 신화, 도상학 혹은 정신병리학까지 포괄하는 상상계의 문법과 체계를 분류한다.

상상력에 대한 바슐라르의 4원소론에 한계를 느낀 뒤랑은 아동심리학에서 출발하는 이미지 분류 원칙을 참조한다. 그 어떤 문화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보편적 심리 토대를 지니고 있는 갓난아이의 행태에서 인간 사유의 근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베흐테레프 반사학에서 분류의 원칙과 ‘지배 반사’ 개념을 차용한다. 베흐테레프를 비롯한 반사학자들은 인간에게 세 가지의 다른 모든 반사를 억제하는 ‘지배 반사’가 있음을 밝혀냈다.

이들은 우선 갓난아이에게서 두 가지 지배 반사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첫 번째 지배 반사는 ‘자세’ 지배 반사로서 인간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반사다. 만일 어린아이의 몸을 수직으로 세우면 그 지배 반사가 다른 모든 반사를 조정하고 억제한다.

두 번째 지배 반사는 신생아의 ‘영양 섭취’ 지배 반사다. 이는 ‘입술로 빨아들이기 반사’와 ‘머리를 적절한 방향으로 위치시키는 반사’를 말한다. 신생아가 젖을 빨 때 영양 섭취 반사는 다른 반사들을 제어한다.

세 번째 지배 반사는 ‘짝짓기’ 지배 반사다. 사실 이 반사는 성장한 수컷 동물을 통해 밝혀낸 반사다. 이 지배 반사는 실험적인 증거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뒤랑은 이 난점을 정신분석학과 생리심리학에서 보충하고자 한다. 이들 학문에서는 성적인 충동이 동물의 행동에서 매우 강력한 지배 요소가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갓난아이의 ‘지배 반사’

뒤랑은 이러한 반사학을 길잡이 삼아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의 500여 쪽(번역판 목차 중 제1권과 제2권)에 달하는 원형과 상징의 거대한 분류 체계를 세운다. 그는 세 가지 지배 반사에 입각해 상상계의 주된 내용을 세 가지 구조 혹은 도식 그룹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분열형태 구조로서 이는 자세 지배 반사와 연관된다. 분열형태 구조라고 뒤랑이 명명한 것은 이 구조가 분열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분열, 분할, 대조가 중시된다.

둘째는 신비 구조로서 이는 분열형태 구조와 상반되는데, 영양섭취 지배 반사와 연관된다. 동화(同化), 동일시, 결합 같은 행위가 이 구조의 특징을 이룬다.

그리고 마지막은 종합 구조인데, 상이한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과정을 강조하기에 ‘종합적’이라는 형용사를 부가했다. 그러나 이는 정립과 반정립의 지양을 의미하는 헤겔식 종합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후일 뒤랑은 헤겔적인 함의를 피하기 위해 ‘종합적’이라는 형용사 대신에 ‘산종적(散種的)’ 혹은 ‘드라마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구조는 짝짓기 지배 반사와 결부된다. 무한한 반복의 힘을 표현하는 바퀴나 나무 원형으로 분화되는 리듬 도식들이 이 구조로 분류된다.

뒤랑은 이 세 구조를 두 개의 체제로 설명한다. 분열형태 구조는 이미지의 낮 체제에, 그리고 신비 구조와 종합 구조는 이미지의 밤 체제에 배속된다. 이처럼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은 경험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 상상력의 소산인 이미지와 상징을 이 두 ‘체제’와 세 ‘구조’의 틀 속에 분류함으로써 상상계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실재가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동양의 상상계다

이미 50년 전에 상상력의 거대한 문법체계를 완성한 질베르 뒤랑이 최근 20여 년에 걸쳐 관심을 가진 주제는 문화적이면서 예술적인 상상계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 연구를 통해 상상계의 변화가 주기적이며, 리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이 공시태(共時態)적이라면, 이후의 연구들은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에 나타난 오류를 교정하면서 상상계의 또 다른 면, 즉 차이나 서로 구별되는 변별성 있는 요소들을 신화 분석 혹은 신화 비평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와 20세기는 프로메테우스와 디오니소스, 그리고 최근에는 헤르메스라는 세 신화 구조가 연이어 서양을 지배해왔다고 지적한다.

질베르 뒤랑의 이러한 최근의 업적은 이미 진형준·유평근(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에 의해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살림, 1997), ‘신화비평과 신화분석’(살림, 1998)이란 제목으로 번역 소개된 바 있다. 마침내 두툼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마저 번역됐으니 상상학에 관한 기본적인 저서들은 대부분 번역된 셈이다.

이제 우리는 서구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참조하면서 동양의 상상계 구조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우리나라의 문화 원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질문할 차례다. 그래야 뒤랑이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에게 던진 질문 - “한국 불교의 ‘상징 사전’을 언제나 가질 수 있나요?”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신화 백과사전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번역에 기나긴 시간을 투자한 번역자의 노고를 치하하며, 다만 신화와 종교, 철학에 대한 주석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치기 어려웠음을 밝힌다. 서양 문명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서이기에 이미 많은 원주와 번역자 주석이 있음에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기현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dumal@chonnam.ac.kr

 

 

 


 

 

[문학예술]´인문학과 소설 텍스트의 해석´

 

 
◇인문학과 소설 텍스트의 해석/서정철 지음/564쪽 1만8000원 민음사

움베르토 에코는 인간만이 지니는 ‘부재를 연출하는 능력’을 일찍이 간파한 바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과된 강제적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강력한 욕망을 지니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허구적 이야기를 꾸며내고자 하는 충동은 필연적인 것이다.

인간은 지금 존재하는 것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도 얼마든지 이야기 할 수 있다. 작가는 종이 위에서 현실을 부수고 새로운 언어의 집과 세계를 만들어 낸다. 온갖 욕망과 판타즘(phantasm·환상),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금기나 제약 없이 펼쳐지는 소설의 공간은 다름 아닌 자유와 상상력과 해방의 공간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대로, 질곡과 억압으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와 대비되는 소설의 역사는 자유와 창조의 역사로서 인간 실존의 다양한 모습들을 발견했으며 새로운 상상력과 가치의 대륙을 개척해 왔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를 통해 근대적 모험을 예고했고, 발자크는 역사 속에 뿌리내린인간의 근원적 모습을 보여 줬다.

리처드슨은 인간의 내밀한 모습을 섬세한 필치로 표현했고, 플로베르는일상적 욕망의 끈적임을 엠마 보봐리를 통해 드러냈다.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는 포착할 수 없는 과거 시간과 현재의 찰나를, 토마스 만은 현재를 조종하는 신화의 모습을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소설을 통해 탐구했다. 말하자면 근대이후 소설은 (돈키호테의 모험에서 출발해서 디포우를 거쳐 카프카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통해 인간의 실존적 영역과 사유의 지평을 확장해 온 셈이다.

다 알다시피 소설은 문학의 고전적 규범들을 모두 파괴하면서 (시민 부르주아 사회의 부상과 맞물려 성장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모든 표현의 형태를 가지고 다양한 삶의 경험들을 시도했다. 이런 역사적 성장과정과 그맥락을 고려한다면, 소설이 방대한 인문적 지식의 바다로 흘러드는 것은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소설은 “단순한 미학적 형식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 인간의 정서와 행동을 철저하게 변형시키는 현상”(프랑코 모레티)인 동시에 다양한 인문학적 사유를 일궈내는 토양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장르의 구분에서 벗어나 소설을 ‘이야기 텍스트’로 규정할 때 소설과 인문학과의 만남은 더욱 더 극적이고 풍요로워진다.

롤랑 바르트로부터 영감을 얻어 새롭게 규정된 ‘이야기 텍스트’ 개념은 자크 라캉과 벨만 노엘의 정신분석학,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 미셸 푸코의 계보학과 담론이론, 미하일 바흐찐의 크로노토프 이론, G 주네트의 서사학 등 다양한 인문학 이론의 그물망을 통해 여과된다.

격조있는 인문학 강의인 이 저서에서 저자는 소설은 단순한 흥미거리가아니라 현대 인문사상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풍부한 사례를 들어 확인하고 있다.

가령, 광기와 성의 역사를 통해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소멸을 예고한 푸코에게 있어서 사드와 바타이유의 소설은 근대로의 이행을 알리는 에피스테메(episteme·인식소 또는 인식체계)의 단절을 드러내는 적절한 예이다. 무의식을 언어구조로 파악한 라캉의 위상학(位相學)의 핵심인 상상계, 현실계, 상징계 이론은 에드거 앨런 포우의 작품 ‘도둑맞은 편지’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바흐찐의 대화주의와 다성성(多聲性)의 문학론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카니발과 전복이론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배태됐다.

주네트의 서사학과 벨망 노엘의 정신분석학 문학방법론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크게 의지하고 있으며 바르트의 텍스트론은 다양한 문학 작품에 뿌리내리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위반과 착란의 언어를 구사하는 바타이유, ‘아무 것도 긍정하지 않는 긍정’의 언어를 구사하는 블랑쇼의 글쓰기에서 소설이란 이야기텍스트는 단순한 인문적 자양분의 제공자가 아니라 철학 너머의 사유와 그 언어체험을 가능케하는 ‘바깥의 사유’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많은 서구 인문학 이론의 소개가 문학과의 소원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 책에서는 소설이라는 이야기 텍스트 읽기에 충실하면서도 서구 현대 인문학의 커다란 흐름을 크게 포획하려는 야심찬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게다가 문학 텍스트를 통해 현대 서구 인문학의 대가들과의 만남은 기분 좋은 지식의 산책이며, 원전의 적절한 소개와 인용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지적 발견이자 학문적 성과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은, 이야기 텍스트로서의 소설이 보다 종합적이고큰 틀의 인문학적 범주에서 중층적으로 논의되려면 언어학을 바탕으로 한 후기구조주의 인문학의 입장뿐만 아니라 리쾨르나 가다머의 해석학, 에코나 들뢰즈의 기호학, 지라르의 인류학적 지평도 당연히 소개됐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다.

김동윤(건국대 교수·불문학) aixprce@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