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벽화::/12' 시민주체 프로젝트[이어서]

[j Global] 도시·산업제품에 색 입히는 남자 … 색채 지리학 창시자, 장 필립 랑클로

오 창작소 2012. 3. 5. 23:20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누군가를 시시콜콜 알아가려면 이런 질문까지 하게 된다. 유치하게만 볼 수 없다. 색은 사람의 취향, 이미지, 속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니까. 색의 상징성이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도 아니다. 나라·도시·마을마다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 따로 있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컬러도 지역마다 다르다는 이론이 있다. 이른바 ‘색채 지리학(geography of color)’이다. 이 분야를 개척한 이는 장 필립 랑클로(Jean Philippe Lenclos·73). 그는 지난 40여 년간 전 세계 도시를 색으로 구분하고, 이를 응용한 색채 작업을 해오며 ‘색채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인천공항·아파트에 이어 이달엔 서울 동작역 철교 기둥들에 ‘한국의 색’을 입혔다. 이참에 지역에 맞는 컬러 궁합이 있다는, 생소하기도 흥미롭기도 한 얘기를 좀 더 듣기 위해 그의 e-메일함을 두드렸다.

이도은 기자

●색채 지리학, 감이 쉽게 안 온다.

 “각 나라·지방·도시는 자신의 빛과 ‘재료’로 특별한 색을 표현한다. 재료란 지형·기후·일조량·관습·전통이 모두 포함된다. 결국 색채는 각 나라, 각 문화에 독창성과 개별성을 부여하는 요소이고, 이 점이 색채 지리학의 근본이다.”

●학문으로 정착시킨 계기가 있었나.

 “1961년 일본 교토시립대학(건축학)에 2년간 유학했다. 그런데 프랑스 북부(파드칼레)에서 나고 자란 내 눈엔 집들이 마냥 낯설었다. 고향에서 보던 빨간색·오렌지색·갈색의 벽돌 집들, 여기에 푸른 자연이 빚어내는 대조의 강렬함이 없었다. 대신 지붕과 벽은 회색과 옅은 갈색이고, 미닫이 문은 흰색 종이로 덮여 있었다. 장소에 따라 컬러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떤 요인에서 지역의 색깔이 결정되는가를 알기 위한 호기심이 연구로 이어졌다.”

●교토가 지역과 색채의 연관성이 특별히 강했나.

 “교토에 가기 전 건물 도색을 전문으로 하는 페인트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래서 프랑스도 지역별로 색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경험 때문에 더 관심이 갔던 것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60년대 교토를 돌이켜보면 집만큼 옷 색깔도 남달랐다.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는 여성들은 아주 세련되고 기교 있는 색채를 조합했다. 유럽 의상에서는 잘 쓰이지 않은 그런 색상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컬러가 그랬나.

 “벚꽃과 아이리스가 만개하는 봄에는 꽃과 같은 색의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을 자주 봤다. 한데 벚꽃색인 옅은 보라색은 프랑스에선 엄숙하고 종교적인 색깔로 알려져 있다. 상을 당한 여성들도 보라색 계통의 옷을 자주 입었다. 그러니 6월에 공원을 산책하면서 보랏빛 기모노를 입은 수많은 여인을 봤을 때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로 돌아온 랑클로는 각 지방의 주거 색채에 대해 조사표를 본격적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색채 지리학이라는 개념 아래 지역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나갔다. 그 결과물인 첫 번째 책 『프랑스의 색(Color of France)』은 퐁피두 대통령상, 지리학회장상, 국제컬러디자인상을 모두 받을 정도로 호평받았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부인 도미니크와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 지역의 흙을 수집하고, 채광을 조사하면서 ‘지역색’을 분석했다. 그는 1969년 모교인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에서 색채학 교수로 재직하다 1978년엔 색채디자인 전문연구소인 아틀리에 3D 쿨레르를 설립했고 이후 집합주택, 백화점 등 건물과 로벤타 가전제품, 르노 자동차, 파커 볼펜 등의 제품 컬러를 두루 맡았다.

●실제 연구는 어떻게 이뤄지나.

 “현장에 가서 스물다섯 채쯤 되는 집의 대표적인 색깔을 뽑아 컬러 도안을 만든다. 여기에 사흘에서 최대 열흘이 걸린다. 이를 모아 아틀리에와 스튜디오, 연구실에서 종합도를 완성한다. 현장에선 잘 몰라도 실제 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주민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 색깔이 얼마나 독특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원의 꽃 색깔조차 그들의 전통색인데도 말이다!”

●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지금까지 8개 대륙과 유럽 전 국가에서 작업을 했다. 하나하나가 흥미로웠지만 가장 도시의 색채가 강렬했던 곳은 조드푸르(jodpur·인도 북서부 라자스탄주에 있는 도시)다. 모든 가옥이 온통 코발트 블루로 덮여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두 번째로는 브라질 북동쪽 지역에 있는 살바도르 데 바이아(Salvador de Bahia)다. 핑크·노랑·청록·파랑 계열과 극도로 밝은 색상이 섞여 있어 마치 파스텔 컬러의 견본카드를 펼쳐놓은 듯하다. 집집마다 벽이 석회유로 칠해져 있고 생기 있고 눈부신 흰색의 풍경을 보여주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화이트 마을’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모은 42가지의 토양 샘플. 천연의 흙 색이 노랗고 붉은빛이 도는 황토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랑클로 부부의 저서 ‘환경, 건축 그리고 색’에 수록돼 있다. [미진사 제공]

●부인과 작업할 때 아내의 역할은 무엇인가.

 “문학을 공부한 아내는 처음부터 사회적·역사적 행위 측면에 대한 조사와 지리학적 문헌조사를 담당하고 있다. 이런 협력작업은 엄청난 위력을 갖는다. 왜냐하면 서로 각자의 감수성을 보완해 주고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전반적이고 더 넓은 시각으로 대상을 본다면 아내는 구성 요소를 보는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연구실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아내는 우리가 내는 책의 텍스트를 작성한다.”

●색채 지리학은 흥미로운 분야다. 하지만 얼마나 실생활에 도움이 될까.

 “80년대부터 국제시장을 겨냥하는 기업가들에겐 색에 대한 각국 소비자들의 전통과 관습이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보겠다. 가전제품 제조사인 로벤타가 내게 일을 맡긴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제안한 8개 중 세 가지만 골랐다. 그가 택한 컬러는 미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다. 결국 이탈리아·프랑스·브라질에서는 사장됐다. 또 DMC라는 실 회사는 거의 비슷한 빨간색 실 12가지 중 네 가지만 만들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만도 큰일이 났다. 남쪽과 북쪽에서 쓰는 빨간색이 달랐기 때문이다.”

●연구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경제 상황의 변화다. 색에 대한 사람들의 감수성을 바꿔놓을 수 있다. 연구는 보통 2년에서 4년 정도를 예측하며 이뤄진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는 이러저러한 색채 환경에 대한 소비자 선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 장기적인 예측의 돌출 변수다.”

랑클로가 맡았던 국내 작업들. 힐스테이트 아파트 외관.

●어디에서나 ‘글로벌’을 외친다. 가장 ‘글로벌한 컬러’는 무엇인가.

 “세계화라는 개념은 색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것 같다. 모두가 겉으로는 표준화를 말하지만 인간은 각자의 문화 속에서만큼은 이를 거부하고 있으니까.”

 랑클로와 한국의 인연은 오래됐다. 교토에서 공부하던 1962년 이후 지금껏 여섯 번 한국에 왔다. 실제 대형 작업도 벌였다. 유리 외관을 전통 자기의 연초록빛으로 꾸민 인천국제공항의 인테리어, 화사한 컬러가 돋보였던 힐스테이트 아파트 외관 채색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이달 동작역 철교·기둥 색채 작업은 삼성전자 갤럭시2의 ‘HD 수퍼아몰레드 컬러 프로젝트’의 일환. 무채색 도시를 화사하게 바꿔보려는 새로운 시도였다.

랑클로가 맡았던 국내 작업들. 힐스테이트 아파트 외관에 이어 이달엔 동작철교 기둥에 화사한 색을 입혔다.

●철교 기둥이라니 특이하다.

 “도시의 기둥 숲은 조화롭고 균형 잡힌 색채연구를 하기에 너무나 멋진 매개체다. 규모·리듬·규칙을 가지고 있다. 콘크리트 회색을 피해 색을 입히면 태양의 스펙트럼을 떠올리게 한다. 또 강변과 푸른 공원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있는 산책과 휴식의 장소라 색의 대비가 더욱 산뜻하다.”

●어떤 기준으로 색을 골랐나.

 “일단 기둥이 받치고 있는 콘크리트 슬레이트의 차가움을 감추고 싶었다. 그래서 꽤 고상한 진회색의 도료를 칠했다. 반면 기둥의 멋진 채색을 돋보이는 게 관건이었다. 한마디로 서울과 똑같은 다채로운 색의 조화다. 여기에 색동 한복의 느낌을 살렸다. 한 가지 색을 여러 톤으로 나눠 쓰는 일본, 현란함이 지나친 중국과는 또 다른 한국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런 특징을 정작 도시에선 보기 힘들다.

 “색깔 사용에 대해 일종의 소심함을 드러내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최근에 갔던 대구가 그렇다. 이 도시의 주를 이루는 색은 중간 정도의 회색이었지만 모래색, 부드러운 초록색, 푸르스름한 색조도 함께 있었다. 충분히 대형 건물이 할 수 있는 ‘컬러 과시’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지난번 고층 아파트(힐스테이트) 작업에서 다이내믹하고 개성 있는 컬러를 부각시키려 했다.”

●앞으로 컬러를 이용해 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도시나 산업시설 밀집 지역 내에 색과 빛이라는 주제로 특별한 건축물을 만들어보고 싶다. 안정과 성찰을 위한 성스러운 장소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사실 분주한 생활의 소음을 피해 이런 공간에 대한 요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비종교적인 성격의 이런 장소에서는 색과 빛의 조합이야말로 내적 성찰과 휴식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What Matters 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독서처럼 나에게는 마음의 양식이기도 하고, 하루하루 달라지는 감정선을 그대로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휴가 때가 아니라면 그리기 쉬운 유화보다는 수채화를 선호한다. 붓으로 데생을 하듯 신중하게 선을 그리는 일이 세심한 마음을 보여주기에 더 적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생한 감정은 색채의 시로 표현된다.”

컬러리스트의 세계

“색채에 대한 감수성 … 한국인들 뛰어나죠”


‘컬러리스트’. 말 그대로 물건과 환경에 최적의 색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고,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 모호하다. 그래서 세계 최고 컬러리스트에게 내놓고 물어봤다.

① 랑클로가 색을 입힌 프랑스 동남부 마르세유 북쪽 도시 ‘엑상 프로방스’의 아파트. ② 건축가 장 폴 비기에와 함께 신도시인 세르쥐-퐁투아즈에 건설한 주택. ③,④ 프랑스 부슈뒤론 지역의 포쉬르메르 내 솔머 산업지구 철강소의 전후 모습. ‘솔머 철강 플랜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작업했다. 랑클로가 가장 인상적인 작업 현장으로 꼽은 도시 살바도르 데 바이아 ⑤ 와 조드푸르 ⑥.



●컬러리스트는 시각이 남달라야 하나.

 “아니다. 모든 사람이 색에 대한 감수성이 있다. 하지만 이 감수성이 교육을 받지 못해 발현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강의하는 수업에서 처음에 대부분의 학생은 색에 대해 무척이나 소심하고 조심스럽다. 심지어 열등감을 갖고 시작한다. 하지만 색채의 조합에 대해 몇 달간 연습하고 나면 나름의 자신감과 자기 ‘색’을 발견하게 된다. 이 중 적어도 15%는 훌륭한 컬러리스트로 성장한다. 이 점에 있어 난 언제나 한국 학생들의 특별한 재능을 높이 사 왔다. 그들은 색채에 대해 굉장한 감수성이 있다.”

●세계 최고의 컬러리스트로서 자부심이 특별할 것 같다.

 “정말이지 다른 컬러리스트보다 특별히 더 낫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디자인·건축을 공부했던 것이 색채 응용에 도움이 됐다. 화장품·아파트·가전제품 등의 색을 택할 때 두루 경험이 투영됐다. 나는 운이 좋게 화가이기도 한데, 그림은 나의 특권 분야며 아주 창조적인 영양분이다.”

●그림을 매일 그리나.

 “언젠가 은퇴하면 온전히 그림에만 집중하리라는 생각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젠 취미가 아니라 훈련이다. 매일 세 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데 할애하고 있다. 어떨 때는 두 달, 석 달 동안 같은 과일을 그린다. 사과라면 처음에 싱싱했다가 나중에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다. 항상 변하고 자라나는 색채의 생명력을 볼 수 있다.”

●색은 어디에나 있다. 일상생활에서 ‘직업병’이 생기진 않나.

 “색을 부분적으로 봐야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작업은 전반적인 색채와 부분적인 색채의 조합으로 생기와 개성을 불어넣는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색은.

 “꽤 과감한 질문이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지 않나. 가령 1970년대엔 유행과 정반대되는 핑크색이 좋았는데, 그림을 그리면서부터는 짙은 회색·모래색을 선호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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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2.17 01:30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