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두번째 모임..
지난 자리에서 우린 각자의 생각을 정리해 오기로 했었다.
난 그간 모아온 자료와 생각들을 정리하여 그 요약을 얘기하였다. 정답을 내어 보이기보단 활동 중 고민이 연장되는 글였다. 그럼에도 딱딱하고 차가워 보이는 글에서 내 고민과 생각이 담겨 보이질 않았나 보다..
모임의 구체적인 방향이 모색된 바가 없었기에 이번 자리에선 생각의 흐름과 표현 방식에 따른 각자의 성향을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계기였다.
모임 주최의 공간이 공간이니만큼 이야기 방향과 흐름은 어찌 되었건 주최 및 주관 단체에 소속된 선배의 진행이 있어야 한다는 얘길 꺼냈다. 그런 후에 이야기되는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고 방향에도 갈피가 잡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선배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방향을 잡아가자!'라는 이야기를 여럿 강조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는 게 먼저라는 얘기도 강조했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지만서도.. 나를 타자에게 들어내 보여야 하는 게.. 퍼뜩 불만이 들었다. '왜 내 이야기를 들춰내야 하는 거지?'
불만이 여전하지만 당최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결국, 내가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감정 속의 욕망을 공공연하게? 들어내는거 쉽지 않다. 선배는 내게 이걸 요구하고 있다. 욕망, 욕구의 문제는 개인이 살아가면서 경험되는 지점에서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삶의 과정이라 생각된다. 물론 경험되어 이해되는 과정과 시간은 생애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하고 개인차가 있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되는 것들도 그 과정의 일부라 본다.
내가 느껴지는 불만은 선-후배라는 관계에서 느껴지는 일방향성이다. 더욱이 반복적인 현상으로 개인이 주체가 되는 삶의 현장에서 인식되어야하는 문제가 그렇지 못했던 점이다. 그럼에도 선배는 선배의 자리에서 내게 이것을 넌지시 보였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표현도 했던것이다. 이러한 감정과 욕망..느낌들은 몸으로 체험되고 지나온 경험을 통해서 해석되어 이해되는 부분이지 결코 강요되어 학습되는 부분이 아니다.
지난 경험을 후배에게 알려 주려는 염려섞인 충고를 이해 하지만, 이해하려 하지 않는 '나'가 있다는 것과 이같은 욕망과 욕구에도 충분히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선배들에게 충분히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 내 몫이다. 자신의 생애는 스스로 이해 되어야 하는 부분이며 누군가에게 이해 받아야 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자리를 통해서 삶의 선배(先輩)와 후배(後輩)의 관계가 스스로 명확해져야 겠더라는 생각을 했다.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도 말이다..
고작 두번째 모임여도 개인적으로 큰 진척이다. 그간 중단했던.. 내 생각을 생각하는거다. 그래서, 난 모임의 시작과 이유 그리고 목적을 뚜렷하게해준 선배들에게 고맙다.. 생활에서 고민되는 지점과 공부들이 겉돌고 있더라는 느낌이 요사이에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정보 공유가 아닌 각자 생각이 섞인 생활에서의 고민이 공유 되어야 하는게 맞을 것 같다.
작품은 독자 또는 관객에게 작가의 생애를 통해서 작품의 이해를 도울 순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이해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창작 행위가 일상생활에 일반적이지 않을 뿐이며 독특하기 때문에 작품의 해석을 위해 생애가 이해받을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작가 또한 평범한 생활인이다.
'나'(작가)를 대신 이야기 할 수 있는 지난 시간(생애) 내지 일상의 글(일기)을 그들은 왜 읽으려 하는가? 작가를 일인칭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작품 속 작가의 숨은 자아를 만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 감상(鑑賞1) 될 뿐이다. 감상은 독자 또는 관객의 1차적 자기 투영(投影)2으로 작가의 모든 창작행위가 작가의 이미지로 재생되는 것을 나는 우려한다. 이것은 짝사랑의 열병과 같다. 과연 그들이 작가를 진정 만날 수 있을까?
이어서 이전에 우연히 구입하여 읽다만 수잔손택의 책을 집어들었다. (이렇게 쌓아 놓은 책들이 얼마나 되는지...ㄷㄷ;)
... 현대의 독자는 발가벗은 작가를 요구한다.
- 수잔손택
그녀는 현대인들의 심리학에 대한 강박을 지난 역사의 기독교적 자기반성과 발견에서 찾고 고난 받는 자를 예술가3와 같게 본다고 파악한다. 예술가는 고난 또는 수난의 효용 방법을 동원하는 자로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소재로 하는 문학에서의 작가관으로 드러나고, - "예술을 모방으로 본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부터 예술을 표현으로 보는 현대의 전통에서 예술가는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한다." - 현대의 사랑 숭배를 루즈몽의 주장을 인용.. 기독교와 유대교의 금욕 전통을 오늘날 몸(감각)의 문제와 결부 시킨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에대한 숭배는 기독교의 유산이 아니라 수난 숭배 즉, "진지함"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상징으로서 수난 숭배의 일면이라 주장한다.
이렇게 서구의 기독교적 감성이 현대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과 성적 사랑을 수난 또는 고난의 소재에 적합하다는 것으로 현대 독자가 발가벗은 작가를 요구하는 이유라 비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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